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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16. 2020

바다를 걸으며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시어머니 힐더가드


어머니가 기대하신 건 말 그대로 '가족 휴가'였다. 넷이서 아침을 먹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저녁에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는 일,  혼자가 아닌 시간들. 나는 바다에서 매일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아침 바닷가



어머니와 1주일의 휴가를 무사히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금요일 밤 우리는 안달루시아를 출발 뮌헨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만 맞으면 어머니가 밤 기차로 뮌헨 공항에서 레겐스부르크로 가시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기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뮌헨의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라 말씀은 드렸지만 말이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인 광복절은 친어머니의 생신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친어머니의 점심 식사에 초대받았다. 휴가를 떠나기 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코로나로 격리만 되지 않는다면 꼭 가야 할 자리였다.


남편은 할 일이 태산이라 휴가를 길게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휴가 중에 남편이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을 싫어하셨다. 우리끼리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아이는 책과 TV와 아이패드 사이에서 심심할 틈이 없을 테니까. 실제로 아이는 휴가 내내 오전에는 파파와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거나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오후에는 파파와 수영장에서, 이른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조개로 목걸이를 만들거나 파파와 탁구를 쳤다. 틈만 나면 룸으로 달려가 TV도 면서. 주로 할머니랑 자주 보던 프로를. 백만장자 되기 같은 퀴즈 프로나 시청자가 들고 나온 엔티크를 전문가가 감정하고 즉석에서 경매하는 프로 같은.


어머니가 기대하신 건 말 그대로 '가족 휴가'였다. 넷이서 아침을 먹고, 아침저녁으로 바닷가를 산책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야외 바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드 게임을 하고, 한낮의 야외 풀장 그늘에서 수영과 휴식을 즐기고, 저녁이면 드레스 코드에 맞춰 옷을 차려입고, 느긋한 저녁을 먹으며 와인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 밤마다 바 앞의 야외무대에서 휴양지에서 준비한 공연을 보고, 늦은 시각 푸른 밤하늘과 반짝이는 별을 보며 다 같이 숙소로 걸어오는 일. 그리하여 혼자가 아닌 시간을. 이번 휴가 때 아이와 한 방을 쓰고 싶어 하신 희망도 이루셨다. 1주일 동안 세 번 오전에 골프를 치러 가셔서 우리에게 깜짝 선물 같은 자유 시간도 안겨주시면서.


  

한낮의 바다



모든 어려운 일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첫날이 가장 힘들었다. 어머니의 체력에 맞추느라 셋 다 녹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올해 일흔다섯이신 어머니는 내 눈에는 '독일인다운 무한 체력'의 소유자시다. 최근 들어 왼쪽 무릎과 오른발에 간혹 통증이 찾아오는 것만 빼면. 첫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도 멀쩡하신 분은 어머니뿐. 오전 10시 휴양지 도착, 밤 10시까지 자유 시간도 휴식도 없었다. 도착 후 점심때까지는 여행가방을 탈탈 털어 옷장에 정리. 독일 어머니들은 정리정돈의 달인들이다. 귀차니즘이 뭔가. 미루는 법도 없다. 이런 건 무조건 배우고 따라 한다. 그건 그렇고, 밤 10시에 다시 플랜을 물으시는 어머니. 남편과 나는 룸으로 즉각 후퇴, 할머니의 룸메이트가 총대를 메고 밤 산책에 동행하는 걸로 첫날을 마감했다.


도착 첫날 기온은 35도. 룸에는 반가운 에어컨이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밀짚모자를 쓰고 어머니와 바닷가를 산책했다. 어머니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다시 이 바닷가를 걷는 일. 생전에 시아버지와 다섯 번이나 오셨다는 이. 4년 전에는 함께 지 못하셨다. 시아버지가 여름이 오기 전에 떠나셨기에. 몇 년 동안 알츠하이머로 투병하셨던 시아버지를 어머니는 집에서 모셨다. 마지막 시아버지와의 여행을 위해 바닷가 휴양지 예약까지 마치셨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시아버지가 가신 후 어머니께도 휴식이 필요했다. 이별을 애도할 시간도. 남편과 나는 어머니께 휴가를 취소하지 마시라 권했고, 어머니는 우리와의 동행을 원하셨다. 살아계셨다면 올해 구십이 되셨을 시아버지는 이번 여름에도 어머니와 내가 바닷가를 걸을 때면 발소리도 없이 우리의 그림자를 조용히 뒤따라오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이른 아침에, 어떤 날은 석양이 지는 저녁에. 어떤 날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저녁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아버지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는지. 두 분의 사이는 어땠는지. 우리 남편을 포함한 세 명의 자녀와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나는 모래가 비단처럼 곱게 깔린 해변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어머니와 걸었다. 어머니의 말씀은 갈매기와 지는 해와 파도와 함께 들었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며 아, 정말요? 오, 그러셨어요? 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사흘 밤낮으로.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시아버지는 여전히 좋은 분으로 남아있었다. 시아버지도 들으셨을 것이다. 저녁 아홉 시  태양이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춘 후에도 오랫동안 바다와 하늘이 그토록이나 눈시울을 붉히고  걸 보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휴양지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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