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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May 12. 2022

#39. 사람은 왜 사는가.

-톨스토이도 고민했었다는 그것.

<감히 식탁에서 아침을 차려 먹겠다고?

오늘의 메뉴는 비율, 온도 완벽한 분유 165ml>


겨울을 지나 봄이 오고

어둠이 끝나고 아침이 온다.

삶은 동전의 양면을 지니고 끝없이 나를 놀리는 것 같다.

지독한 불행이 어느 날 내 인생 기회가 되기도 하고

행운이 한순간 내 목을 조이는 비극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모두 잠자고 어둑한 밤이 찾아온

거실에서 단 몇만 원이 없어 전기가 끊어지는 사람이 나오고 바로 뒷 채널에서는 우리 집을 팔아도 못 사는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나온다.

열심히 산 결과와 나태한 삶을 산 대가인 것 일까.

부는 그동안 노력의 대가로 나타나는 단순한 것인지 그저 출생과 같이 운으로 결정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단순한 운이라면 열심히 살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 문득 언제부터 나는 잘 산다는 기준을 부로 평가했었나 부끄러워졌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끝까지 살아봐야 안데이."

누가 비겁한 짓을 해서 엄마가 연을 끊었는데

그가 너무 잘살고 있단 소문이 났을 때도,

내가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해 절망했을 때도 엄마는 자주 저 말을 했었다.


그래서 그런가. 인생을 살다 좋은 일이 생겨도, 나쁜 일이 닥쳐도 끝까지 가봐야 알 인생. 지금 너무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자란 생각이 들었다. 맘껏 행복할 수 없는 불안을 은근히 전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비극 앞에서 니까짓꺼 곧 지날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 무심히 툭툭 털고 일어날 힘을 주기도 했다.


누군가 법륜스님에게 왜 사냐고 물었다. 그냥 사는 거며 하루하루 사는데 이유가 없다고 했다. 왜 사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올바른 질문이라고 답했다.

열두 살 때 법륜스님에게 누군가 이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면 꽤나 묵직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도 든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왜 사는 걸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했었다.

돌이켜보면 사춘기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늘 그 질문에 답을 찾으러 애썼다. 그리고 그 답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나이에 따라 늘 달라졌다. 중학생까지는 성공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분야에 유명해지는 것 그래서 윤택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두 태어난 것이고 훗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존재의 이유에 탈락한 대상이라 여겼다. 자연스레 그 성공은 일단 대학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등생이 아니었고 공부는 늘 내 노력에 비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보답했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코뿔소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학교에도 말해줄 테니 심자(야자 다음 심야 자율학습 있었다)도 하지 마. 동네에서 너 서울대 가는 줄 알아.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

엄마는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니 차라리 그 노력을 다른 분야에 열중해보라고 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과는 다르셨다.


아. 내가 남들이 볼 때 서울대 갈 정도로 열심히 하는 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아니라면 공부로 성공을 찾긴 어렵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생각했다. 그 이후 여유가 생겼고 공부에 꾸역꾸역 목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성적은 비슷했다.


일단 좋은 대학이 곧 성공한 삶은 아니었다. 열여덟의 나는 다시 왜 사는가 고민했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다시 다른 답을 냈다.

도면을 보거나 그리는 것에 흥미가 있어 즉흥적으로 교내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지만 결국 큰 자리는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밀렸다. 좋아했지만 잘하는 일은 아니었다.


왜 사는 거지?

동생 꿀돼지 말처럼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건가. 어떤 일이든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데 하물며 출생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일까.

태어난 이유를 찾고자 늘 고민했고 특히 한 해가 마치고 새해가 되면 더 고심했다.


그 이후에도 수십 번 답이 바뀌고 지금은 왜 사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중이다.  십 대 때 목표로 잡은 부자의 삶, 유명인의 삶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성공이라는 기준을 달리 보게 되었다. 결국 실패해서 스스로 위안 삼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눈앞에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가진 것에 감사하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 조금이라도 흉내 낼 수 있다면 내 출생이 적어도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보다 어렵다.  오늘은 아이 친구 엄마가 다른 엄마 험담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휩쓸려 거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검은 말을 토해내고 집에 오는 길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내가 정했던 삶의 목표는 생각보다 지켜내기 어렵다. 하지만 부족함이 많기에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고 부끄러운 오늘을 만회하고자 내일은 더 집중해서 살아갈 것이다.


왜 사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열두 살에 시작한 질문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이 없는 채로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기혼자가 되고, 엄마가 되어버렸다.

노인이 되는 날에도 아마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 같다. 평생 보물지도를 들고 끝없이 항해하는 것.

실체가 없는 허상을 쫓아 늘 움직이는 것.

하지만 그 과정만 올바르다면 마지막 보물의 존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미 보물은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지도만 보다 미처 내 손에 쥔 것을 못 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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