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 말았지
전 세계적으로 김을 즐겨 먹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요즘에서야 김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몸값이 올라갔지만 이전까지는 김은 거의 한국인이 다 먹어치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김을 그냥 먹기도 하고 김무침 같은 반찬, 바삭한 간식인 김부각, 혹은 계란말이에도 넣어먹고 국으로도 끓여 먹을 정도로 다양하게 이용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김의 소비가 가장 많은 분야는 단연 김밥이다.
까만 김 위에 하얀 밥을 고르게 펴고 그 위에 색색의 채소와 햄, 단무지 등을 얹고 돌돌 말아내서 한입크기로 썰어내는 김밥. 맛있고 저렴하고, 간편하고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어린 시절 소풍날 아침에 엄마가 집에서 싸줄 때 옆에서 하나 둘 집어먹던 게 소풍 가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던 기억도 많을 것이다. 친구들과는 집집마다 김밥 맛이 어떻게 다른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 혹은 라면에 김밥 조합은 학창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안 먹어본 사람이 없다. 이렇듯 김밥은 추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김과 김밥
일단 우리가 김을 먹게 된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겠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김을 먹기 시작한 기록은 삼국시대 이전이라고 본다. 사실 김이라는 것은 그냥 바닷가에서 자라는 이끼에 불과하다. 굳이 파도치는 바다에 들어가서 이끼라고 불리는 김을 뜯어먹은 이유는 주변에 먹을 것이 없어서였다.
삼국시대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먹던 김이 어느 순간 별미로 떠오른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상류층의 밥상 위에 오르는 고급 음식이 됐다. 바다의 감칠맛이 감도는 김을 밥에 싸 먹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꽤 맛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산 김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상류층 간에서도 꽤 비싼 선물로 오고 갔었다.
그 후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김을 양식 재배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대나무를 바다에 꽂아놓으면 김의 포자가 알아서 들러붙는다. 지금처럼 대량생산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맛보는 정도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김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노리마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조선 후기 때 [동국세시기]에 김과 밥을 싸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단순히 김과 밥을 싸 먹는 역사는 여러 문헌에 남아있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먹는 원형은 노리마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밥은 노리마키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으로 전파되고 해방 이후 경제 성장을 거치며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밥에 식초와 소금으로 밑간을 하고 나물과 야채, 단무지를 넣어 말아먹었다. 지금은 분식집에서 흔한 메뉴이지만 그 당시에는 일식집에서나 볼 수 있는 메뉴였다.
김밥에 식초가 빠진 조리법은 70년대 후반에 나온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래도 80년대까지는 식초를 쓰긴 했는데 이는 김밥이 "소풍 때 싸가는 특별한 도시락"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아무래도 야외에 싸가는 도시락은 밥이 금방 상할 수 있기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하는 식초는 거의 필수적이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가정에 어느 정도 냉장고 보급이 이뤄지고 김밥을 만들 때 거의 모든 재료를 익히기 때문에 굳이 식초를 쓰지 않아도 됐다. 또한 김밥이 간단해 보여도 각종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손이 많이 간다. 한 번 김밥을 싸면서 나오는 재료들은 종류가 꽤 많은데 김밥이 아닌 다른 요리에도 활용하다 보니 식초보다는 참기름이 한식과 콜라보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김밥 한 줄
김밥의 매력은 안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단무지와 계란, 당근, 시금치가 들어가는 근본 중의 근본 야채김밥에서 참치와 깻잎의 미친 조합인 참치김밥, 고소한 치즈김밥, 소시지 김밥과 돈까스 김밥등 넣는 대로 어우러지고 맛있다. 있는 재료로 대충 때려 만들어도 기본은 하는 게 김밥인 것이다. 종류만 따져놓고 보면 끝이 안 보일 수도 있겠다.
내용물은 별로 없지만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 꼬마김밥(마약김밥)도, 김에 말린 밥과 반찬을 따로 먹는 충무김밥의 형태도 있다. 또 편의점에 가면 한입에 즐길 수 있는 삼각김밥도 종류가 엄청 다양하다.
요즘은 건강 트렌드에 맞춰서 현미나 잡곡밥으로 대체되기도 하고 밥이 아예 안 들어가는 키토김밥도 인기다.
좋은 재료가 많이 들어가다 보니 김밥 가격도 점점 비싸지고 있다. 김밥은 오래전부터 가격이 싸다는 인식이 있어서 김밥을 비싸게 사 먹는 게 영 어색할 수 있지만 들어가는 재료와 정성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최근엔 K콘텐츠가 떠오르면서 김밥의 인기가 높아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국 음식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우리가 자주 먹는 음식이 김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출이 많아졌다. 김밥은 나름 탄단지가 꽤 균형 있게 잘 들어있는 음식인 데다 패스트푸드보다 상대적으로 저칼로리, 저지방인 점이 요즘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졌다. 또한 채식주의자나 비건에게도 적합하다. 고기나 햄을 빼고 두부, 아보카도, 버섯 등을 넣으면 맛있고 훌륭한 메뉴가 된다.
정말이지 김밥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메뉴가 아닐까 싶다. 집에서 익숙하게 즐기기도, 끝없는 새로운 맛의 조합으로 특별하게 즐길 수도 있다. 어제는 소풍 도시락이었다가 오늘은 해외 SNS의 핫한 푸드 트렌드가 된 김밥. 내일은 또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 궁금해진다.
Tip.
먹고 남은 김밥은 냉동실에 얼려뒀다 계란물에 부쳐먹으면 꿀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