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레이스 2025
우리나라 3대 마라톤 대회가 있다.
동마, 제마, 춘마.
각각 동아마라톤, jtbc마라톤, 춘천마라톤이다. 역사도 오래되고 인지도가 가장 높다. 뭣도 모르지만 유명하다는 대회는 나가보고 싶어서 2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신청하려고 했는데 이미 그보다 1년 전에 신청이 끝나버렸다.
이 정도 인기였어? 하고 그다음 해에 열리는 대회신청일자를 미리 알아두고 신청하려 했지만 사이트도 못 열어보고 실패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대회구나.. 생각하고 반쯤 포기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 마라톤 자원봉사를 하면 해당 대회의 다음 연도 우선출전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동마크루가 뭔데?
그래서 당장 자원봉사 자리가 있는지 먼저 살펴봤다. 동마크루 사이트나 러너블이라는 앱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매진이었는데 12.5K의 스펀지대가 남아서 냉큼 신청했다. 항상 10K만 뛰어봐서 스펀지대가 뭔지 몰랐는데 물에 적신 스펀지를 테이블에 올려두면 선수들이 가져가 머리 위에 물을 짜거나 땀을 닦는 용도로 쓰인다. 어쨌든 이런 일도 해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신청하게 되었다.
신청 때는 동아마라톤(서울마라톤)인 줄 알고 신청했는데 한참뒤에 다시 보니 서울마라톤이 아닌 서울레이스였다. (하하;) 뭔가 둘 다 서울달리기 느낌이라 얼추 그런 줄 알고 신청했다. 뭐 아무튼 검색해 보니 이 대회도 15,000명이나 참가하는 꽤 큰 대회였다. 대회 며칠 전에 크루리더에게 참석하는데 문제가 없냐는 문자가 왔고 당연히 오케이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대회 전날에 다시 한번 주의사항 안내가 포함된 확인 문자가 왔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주말이지만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기대반 설렘반으로 대회 당일이 되었고 6시 30분까지 모여야 했기에 일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기적을 행했다.
러너들을 위한 자원봉사
대회 장소까지는 집에서 40분 거리지만 대회에 나갈 때보다 더 긴장되는 마음으로 집에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아직도 밤처럼 어두운데 버스는 또 열심히 다닌다. 기온도 꽤 서늘하니 오늘 뛰는 사람들은 기분 좋게 잘 뛰겠구나 싶었다.
12.5k 지점은 동대문 근처의 청계천.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아직도 한참 어두운 주변을 둘러봤다. 대회 시작은 8시지만 그 대회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찍 준비를 시작하는구나 싶다. 다들 어색하게 쭈뼛쭈뼛 있다가 인원이 모두 모이면 일단 장갑과 우의, 조끼를 나눠준다.
처음이라 어리바리하고 있는데 역시나 자원봉사 나온 분들 중 일부는 이미 꽤 경험이 많은 분들인 것 같았다. 크루리더가 조금 버벅거리고 있을 때 더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했다. 스펀지대였지만 조를 두 개로 나눠서 한쪽은 스펀지, 한쪽은 급수대로 나눴는데 나는 급수대 당첨. 거기에서 또 3명씩 조를 나눈다.
급수 테이블은 총 5개로 테이블이랑 물, 종이컵도 각각 나눠서 놓고 이제 대기하면 된다. 해가 뜨고 7시 30분쯤 아침 도시락을 나눠줘서 배가 안 고파도 혹시 모르니 일단 먹어둬야 좋다. 한솥 도시락 오랜만에 먹어보네.
먹을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구석에서 쭈구려 먹거나, 테이블을 활용해서 대충 먹었다. 밥도 다 먹고 이제 뭘 하냐? 무한대기 하면 된다. 8시에 하프 주자들이 출발하는데 12.5k까지 첫 주자가 오려면 거의 40~50 이 걸린다. 기다림만 한 시간 넘게 한 듯하다. 게다가 비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서 다들 구석에 쭈구려서 처량한 기다림을 가졌다.
다행히 비는 금방 잦아들었고 경찰차가 오가며 도로가 통제되고 있었다. 난 처음부터 모든 코스를 전부 통제하는 줄 알았는데 출발지부터 순차적으로 통제가 시작된다. 현장에 나오니 이런 걸 깨닫네. 하긴 서울에 차가 얼마나 많은데.
생생한 현장감
물은 따 놓는 게 좋다고 해서 전부 따 놓고 종이컵도 잘 준비해 뒀다. 드디어 시간이 지나 8시 40분 가까이 될 무렵 경찰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사람들 모두 1등을 보려고 미어캣마냥 고개를 빼들고 있다.
엄마 나 1등 처음 봐!
번개세요?
거북이처럼 달리는 나는 왜 이렇게 빨라? 하고 무지 놀랐다.
저 속도로 1시간 넘게 뛰신다고요?
뭔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라 현실감이 없다.
아쉬운 건 물 한잔 안 드시고 지나치셨다는..
그 뒤로도 2등 3등 주자들이 오고 상위권 주자들이 쭉쭉 밀고 들어왔다. 우리 테이블 물을 마셔주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파이팅도 크게 외쳐주고 초반에는 되게 할 만했다. 중간중간 "감사합니다"하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내가 더 감사했다.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말까지 하다니 당신은 천사인가요?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즐거워했는데 곧 엄청난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가장 많은 중간 페이스 선수들이 우르르 밀려왔다. 그때부터 나는 사진이고 뭐고 물 따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뛸 때 테이블에 물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느려서 물이 없는 줄 알았다.
물을 따르면 수십 개의 손이 뻗어 나오고 빈 컵을 들고 가시는 분들도 있었다(죄송;) 물을 따르는 족족 없어지고 헉헉대는 숨소리만 내 앞에서 들린다. 나는 사람들 얼굴 볼 틈새도 없이 물컵만 보고 따르기만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한참 사람들이 밀려오는데 그 많던 종이컵이 동이 나고 말았다. 아직 뛰는 사람들이 물을 찾았지만 텅 빈 테이블을 지나쳐야 했고 어찌할 수 없어서 물병째로 드시게 했다. 이게 뭐람.. 곧 종이컵을 새로 사 와서 다시 물을 채울 수 있었지만 물이 없어서 지나친 분들께 괜히 너무 죄송했다.
그렇게 이제 거의 마지막 주자까지 보이고 뒤이어 경찰차도 도로통제를 해지하면서 오고 있었다. 마지막이어도 끝까지 뛰는 분들께 박수를 보내고 슬슬 테이블을 정리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분이 계셨다. 도로 통제도 풀렸지만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 뛰는 정말 마지막 주자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느렸지만 포기 않고 끝까지 뛰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찡하기도 하고.. 그분이 꼭 완주 메달을 받길 기원하며 정말로 마무리를 했다. 쓰레기 정리까지 마치니 10시가 좀 넘었다. 짧고 강렬한 동마크루 자원봉사였다. 아주 좋은 경험이고 나처럼 조금이라도 뛰어본 사람들도 한번 해보는 걸 추천한다.
그나저나 물을 정신없이 따르다 보면 신발이 다 젖으니 방수가 잘 되는 신발이나 신발 보호 비닐을 준비하는 게 팁이라면 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