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만 하자
어느새 그날이 다가왔다.
하프 마라톤을 처음 도전 하는 날이다.
누군가에겐 흔한 대회 참가이지만 나는 전날 밤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냥 나가서 즐기면 되지 뭐'
이런 마음으로 계속 나를 다독였지만 처음이라는 설렘과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분명 내가 처음 10k 대회를 나간 이유는 단순히 메달 모으는 재미였다. 그냥 딱 재미로 즐기면서 뛰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생긴 욕심은 결국 나를 하프마라톤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이 대회를 신청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환상적인 코스'
보통 마라톤 대회는 반환점을 돌아 다시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나는 지난 길을 다시 달리는 것을 꽤 지겨워하는 편인데 이번 대회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르다.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잠실경기장까지 서울의 핵심 코스들을 달리는 코스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만 직진하는 코스라니! 너무 마음에 든다.
서울의 반을 가로지르는 코스만 봐도 유니크한 대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코스만 보고도 이 대회는 무조건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충만해진다.
'두근두근'
대회 10일 전에 사전기념품이 왔다.
꽤 비싼 참가비(8만 원)에 비해서는 구성이 조금 아쉬웠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는 H조다. A ~ H까지 조가 나뉘어 있고 조를 결정하는 것은 내 기량껏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어차피 잘 뛰지 못할 것 같아서 맨 마지막에 출발하는 H조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력과 상관없이 앞쪽 조를 선택해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나았겠다.
대회 날이 다가오기 전에 준비 방법을 많이 찾아봤다. 연습은 어떻게 하는지, 식사와 휴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평소에는 10k 정도씩 뛰고 주말은 쉬는 편이었는데 주말에 장거리 몇 번은 뛰어봐야 했다.
10k 이상의 거리는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2k씩 늘려나가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대회 마지막주에는 18k를 뛰어보고 대회에 나갈 생각이었지만 역시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꼭 주말이 되면 무슨 일이 생기고 몸이 안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슈와 핑계로 결국 가장 길게 뛰어본 거리는 14k였다. 거리는 어떻게든 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2시간 30분'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싶어 스트레스받는다.
대회 전날까지 연습을 게을리한 자의 걱정은 계속됐다.
'아, 연습 좀 더 할걸'
걱정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뛰었어야지 쯧쯧.
설레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을 설쳤다.
하지만 전날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탓인지 기분이 업되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니 힘이 넘쳤다. 이미 몸에 에너지는 많은 거 같지만 괜한 조바심에 빵도 하나 더 먹어주면서 내 연료통을 가득 채우고 출발했다.
광화문, 시청 일대에서는 거의 매주 마라톤 대회를 연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많이 참여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제법 큰 대회도 많이 열고 코스가 좋다 보니 말이다. 이번 대회도 3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몰렸다.
게다가 조금 춥긴 했지만 날씨도 너무 맑고 좋았다. 달리면서 땀이 조금 나겠지만 꽤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날씨다. 후다닥 짐부터 맡기고 몸도 풀고, 괜히 긴장되니 화장실도 자주가게 된다.
대회 시작은 8시이지만 앞조부터 순차적으로 출발하다 보니 마지막 H조는 30분 정도 늦게 출발한다.
러닝인구 천만 체감 중.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걷는지 뛰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시작은 10k를 뛸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오늘 나의 목표는 무조건 '완주'.
최소 2시간 20분에는 들어오고 싶었다. 무사히 안 다치고 회송차량 안 타길 빌면서 나아갔다.
하얀 풍선에 '02:30'이 써져 있는 페이스메이커만 잘 따라잡으면서 가면 된다. 일단 나와서 뛰게 되니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대감만 남게 되었다.
가장 늦게 출발했지만 다들 비슷한 실력인지라 어느 누구 하나 빠르진 않았다. 그래도 다들 웃으면서 이야기하며 달리니 나 또한 기분이 좋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와 노랗게 물든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뛰니 지루할 틈은 하나도 없었다.
중간에 커다란 전광판에 내 얼굴이 나올 때 손을 흔들면서도 가보는 재미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나 싶다. 정말이지 마라톤 대회는 이런 소소한 재미때문에 계속 참가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로만 지나가보던 지하차도를 달려서 가는 경험은 또 어떻고 말이다. 이렇게 계속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힘들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 빠르진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을 따라잡다 보니 2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까지 따라잡았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지칠까 싶어 중간중간 급수대에서 물이고 포카리고 간식이고 전부 빠짐없이 먹고 달렸다. 그래서였는지, 10k를 훨씬 지난 시점에서도 그다지 피곤해지질 않았다.
연료도 잘 채우고 기분도 좋고 날씨까지 완벽한 레이스였다. 최종 성적은 목표보다 4분 정도나 앞당겨졌다니 나에겐 성공적인 첫 마라톤이다.
나중에 누군가 올린 막판 스퍼트 영상에서 내 모습을 찾아봤다. 분명 나는 마지막에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 하지만 영상 속의 나는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라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슬로모션인가?'
내 기억으로는 그 지점을 1초 만에 지나친 거 같은데 말이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느껴졌다.
처음을 이렇게 기분 좋게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 3일 동안은 무릎과 발목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는 것 같지만 이 정도쯤은 금방 나을 것이다.
처음을 기념하는 소고기 파티는 빠질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