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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w We C Dec 27. 2023

창의력에 뿌리내린 노동자들

노력과 노고로서의 창의노동


노동 전선의 풍경


  육체노동자이자 영화감독인 친구의 장편 연출작이 2023년 서울독립영화제에 선정되어 기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뿌리 이야기(2023)>라는 극영화였다. 영화의 시나리오와 촬영 원본은 친구가 틈틈이 보여줬던 지라 어떻게 전개될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역시 영화관에 기분 좋게 감금된 채(?) 집중해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많았다.


  플롯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이민을 준비하던 주인공은 함께 보도블록을 깔던 육체노동자들을 한 분씩 만나고, 이들과 함께 연을 맺었던 동료 가운데 먼저 세상을 떠난 이의 시신이 묻힌 곳을 방문한다. 그 과정에서 시종일관 함께 일하고, 이야기하고, 잠들고, 다시 일어나 활동하는 일상의 순환을 화면에 담는다. 그리고 별다를 것 없는 순간순간에 자리한 우리 주위의 평범한 노동자들을 뚫어지게 보도록 만든다. 그들의 표정은 물론, 가벼운 제스처, 호흡과 호흡 사이의 옅은 소리마저 생경하게 느껴질 만큼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을 집요하게 관찰하도록 이끈다.        


  영화의 묘는 사실 관찰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찰 너머로 느껴지는 피사체를 향한 존중에서 피어났다. 함께 동거동락한 동료들의 모습을 어떠한 영화적 기교로 포장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지긋이 바라보니, 서로를 향한 인간애가 화면 밖으로 배어 나왔다. 고단한 노동의 나날들에 대한 비애도, 앞으로 펼쳐질 나날들에 대한 장밋빛 기대도 없지만, 섣불리 단정하는 법이 없어 도리어 삶의 여정이 한결 미덥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온기로 채워진 영화였다.  


어느 한 인물의 뿌리를 추적하는 서사라기보단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될 수 있는지를 따스히 조망하는 영화다.


  영화에 담긴 주변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기획자, 마케터, 디자이너 혹은 작가로 활동하는 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일단 하루의 대부분을 모니터 앞에서 인상을 쓰고 앉아있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긴 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키보드 백스페이스 키만 하얗게 바랜 노트북...그래도 쓸데없이 종이 낭비 안 하고 애꿎은 키보드만 괴롭힌 덕에 딱히 살린 아이디어는 없어도 환경은 살려 기특한 우리. ^^ 그런 우리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창의노동자는 누구인가


  '창의노동자'. 제일 먼저 떠올린 단어였다. 엉겁결에 내가 지어낸 단어가 아니라, 재학 중인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빈번하게 듣는 표현 중 하나다. 창의노동자는 사회학에 기반을 둔 영국계 문화연구자들이 주로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급증한 미디어 산업에 종사하며,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표현이다. 즉, 주변에서 보편적으로 쓰인다기보다는 미디어 담론을 위해 생성된 학술 용어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 단어를 대학원 울타리 밖에서 쓰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에 익숙한 밀레니엄 세대의 사회학도들이 작금의 문화 생산자들의 노동 소외와 노동 윤리를 생각하며, 교정의 울타리 속에서나 쓰는 은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곱씹어보니, 이 단어를 아카데믹한 차원에서만 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창의적 활동의 결과물들이 별안간에 떠오른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에 따른 인내의 결실임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표현이 아닐까.


국내에 번역된 대표적인 창의노동 관련 이론서로, 원문은 2011년에 번역본은 2016년에 발간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노동은 사람이 생존·생활을 위하여 특정한 대상에게 육체적·정신적으로 행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사회용어다. 생존과 생활에 직결된, 그러니까 우리가 입고, 먹고, 자는데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활동을 가리킬 때 우리는 일할 '노(勞)'에 움직일 '동(動)'을 쓴다. 이때 노(勞)는 일하다 뿐만 아니라, 애쓰다, 고달프다, 괴로워하다, 근심하다의 의미를 함께 가진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일하는 것은 단순히 생산성을 담보하는 활동이라는 의미를 넘어, 고통을 수반하는 활동이라는 것이 표현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활동이 '일'이 되는 순간,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노동'이라는 한 단어 안에 기가 막히게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창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는 별개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자신의 일이 앞서 설명한 노동의 의미에 부합함을 실감할 것이다. 이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 창작의 고통이 특별히 더 커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답고 독창적인 좋은 창작을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과 노고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대가 펼쳐졌다는 뜻이다.



노력과 노고로서의 노동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느낄 만큼, 훌륭한 기성 창작물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나만의 뚜렷한 색을 찾는 과정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게다가 창작을 업으로 삼는 이라면, 자신을 잘 포장할 줄 아는 퍼스널 브랜딩 역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감에 따라, 창의노동의 강도는 가파른 J커브를 그리며 세지고 있다. 그 결과, 좋아하는 걸로 먹고살 수 있어 행복하다는 식의 긍정회로로 충만했던 이들의 의식에도 점차 녹이 끼며, 일한다(勞) 너머에 자리한 괴롭다(勞)의 감각에 휩싸이게 되기 마련이다.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 작가님, 감독님 등 창작자로서의 개별적 역량을 인정하는 이런 개념들에는 선망의 뉘앙스 외에도 한 노동자의 인고의 서사가 숨어 있다. 혹자에게 저런 호칭으로 불리며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기까지 창의노동자들은 각자의 노동 전선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해 왔고, 앞서 나가기 위해 경쟁자들과 얼마나 많은 각축전을 벌여왔을까. 요즘 창의노동자들은 이런 과정 역시 대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성장 서사'로 프레이밍 하고 셀프 마케팅에 활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물론 이런 스토리텔링을 보면 그들의 실패에서 성공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에서 창의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위기의 면면은 일부 배제된다. 창의노동자들의 일상적 위기는 과장을 보태 말해보자면, 매분 매초 소란스럽게 찾아온다. 과열된 생존 경쟁 구도 속에서 자기 확신을 갖기가 점차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미끄러지기만 하는 거 같은데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어떻게 해야 뚝심 있게 나를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면 대체 언제쯤 나의 노력과 노고가 빛을 볼까. 이런 끝없는 자문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 오늘날 창의노동자들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오늘날의 창의노동자들이 본질적으로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고, 그에 따라 어떤 답을 내려야 할지에 관해 탐색해보고자 한다. 오늘날의 창의노동자들이 그려가는 개별 서사를 경유해 이를 메타적으로 조망하며, 이 해답을 찾는 데 있어 필요한 의식적 단서들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로 비유컨대, 아직 어디에도 확실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를 비롯한) 창의노동자들이 각자 어떤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릴지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시리즈가 되기를. 그리하여 머지 않아 자신만의 단단한 뿌리 위에서 하나의 남다른 브랜가 되기를.


  이를 위해, 차차 내 사적 경험과 문화적 경험을 버무린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풀어보기 위해 노력...아니 '노동'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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