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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w We C Jan 06. 2024

오직 다정한 것은 살아남지 못한다

다정함에도 뾰족함이 필요


다정함의 열풍, 균형에서 찾다


  체감상 1-2년 전쯤부터였나. '다정함'이 누군가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급 수식어이자, 세상을 구원하는 원동력처럼 불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다정함의 열풍이었다. 최근에는 그 열기가 한 풀 꺾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전히 여러 콘텐츠의 카피와 썸네일에 심심치 않게 활용되면서 은은하게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다정도 병'이라던 교과서 속 시조도 있지만, 사실 다정함만큼 누구나 위화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단어도 흔치 않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심지어 썸남썸녀끼리 써도 어디에나 착 달라붙는 칭찬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탄생한 신조어도 아니거늘, 근 몇 년 새 갑자기 사람들이 이토록 다정함에 매료된 지점은 무엇일까.


원제(Survival of the Friendliest)를 직역하면, 다정함보단 '친화력'이 조금 더 적합해 보이지만, 뭐 어때. 시대가 원한다는데.


  일단 합리적 의심 1. 우리 사회에 점차 깊어가는 개인의 소외와 그에 따라 각박해진 사회를 훈훈하게 달굴 한줄기 빛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미 만인이 익히 알고 있던 다정함이란 개념이 새롭게 눈에 들었다. 잠시라도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의 외로움을 다정함으로 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거나 믿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외로움의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의 마스터키처럼 다정함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람들은 발생 비용이 0인 이 무형의 재화를 열심히 만들고, 포장하고, 서로 선물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다정함의 가치를 드높였다.    


  혹은 합리적 의심 2. 오만과 편견이 만연한 세상에서 휘청거리는 것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기준 가치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유사한 긍정어 가운데서도 다정함이 유독 건강하고 균형감이 좋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가령, '착하다'는 말은 때에 따라 '실속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친절하다'는 말은 종종 '부담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데, 다정함을 놓고 보면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함의가 (거의) 없다. (반례가 잘 떠오르지 않는데, 혹시 있다면 댓글 요망) 이는 단어 자체가, 태생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쓸 수 있는 다정하단 말의 견고한 균형감에 이끌렸다.


  두 논리 모두 우리 시대가 다정함에 이끌린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데 무리는 없겠지만, 후자에 좀 더 무게를 실어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다정함의 붐에 제대로 올라탔던 공인들, 예술가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단순히 따스함을 넘어 자신만의 '올곧은 강단'을 갖추고 있었다.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도 좌중을 압도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할까. 왠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양 극단에 서 있는 이들도 한 자리에 평화롭게 불러 모을 수 있을 것 같은 가치중립적인 힘을 갖춘 이들은 누구였나.



다정함의 주역들


  먼저 '알쓸' 시리즈를 대표하는 패널인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를 떠올려 본다. 일단 해당 시리즈 내에서 김영하 작가를 비롯해 다정함으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 꽤 있지만, 김상욱 교수만이 다정함의 수식을 획득한 건 다분히 마케팅 전략의 차원이긴 하다. 물리학이란 쿨톤에 다정함이란 웜톤을 덧대야 의외성이 생기고, 그래야 각인효과가 크니까. 하지만 전략의 근간에 있는 캐릭터의 본질을 두고 봐도, 이 근사한 별명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과학계 내 에듀테이너로 활동하는 여러 셀럽 가운데서도 유독 김상욱 교수는 과학만큼이나 인문학에 조예가 깊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학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나보다 마르셀 뒤샹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과학자...현타가 온다


  개인적으로 그의 포텐이 만개했다고 생각하는 '알쓸인잡'에서 그는 과학자로서 대중들에게 자신에게 영감을 준 여러 예술가들도 소개한다. 레디메이드 개념의 시초 마르셀 뒤샹, 천재 시인의 아이콘 이상 등, 보통의 이공계생들이 이름 정도 들어봤을 법한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능숙하게 자신의 언어로 설명한다. 한 과학자의 망막을 거쳐 지각된 예술가들이 과학자의 입을 거쳐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통찰력 있게 소개될 때, 우리는 잠시 이과와 문과가 이렇게 한 인간 안에서 화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그는 우리가 늘 갈라치기 하는 이과적 사고, 문과적 사고라는 구분이 어쩌면 이분법적인 편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만든다. 그의 통합적인 사고를 엿보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의식 깊이 자리한 문과다움, 이과다움이라는 프레임을 깨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저력의 정체는 바로 그가 가진 단단한 균형감, 그러니까 다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를 이과생 치고는 꽤 문과적이잖아? 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대중들은 서서히 그의 다정함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다정함 열풍의 끝판왕이라고 봐도 무방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2022)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한창 인기몰이를 할 무렵, 이를 기가 막히게 한 줄로 잘 압축해 표현한 박찬욱 감독의 감상평이 꽤 회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을 보니 내 눈에 눈물이" 아니, 너나 잘하시라던 시니컬한 친절함의 대명사께서 이렇게나 귀여운 감상평을 남기시는 건 반칙 아닌가.


  아무튼 영화가 펼친 난장판을 뚫고 나오면, 자기도 모르는 새 감정이 격해지게 만드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널리 알려져 있듯, 'Be kind(다정하라)'이다.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다음과 같았다.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 거야' 흠...아직 안 우신 분?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다정함의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할 것이다. 무능하고 존재감이 미미했던 에블린의 남편이자, 조이의 아버지인 '웨이먼드'가 말한 다정함이 이 대서사를 봉합하는 것을 보며, 혹자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옛말을 떠올리기도 하고, 혹자는 '언더독의 반란' 같은 것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유독 이 영화에서 다정함의 메시지가 한결 폭발적인 임팩트를 대중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어지럽게 펼쳐지는 멀티버스 속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삶, 그 카오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으로 다정함이 너무도 적절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웬만한 영화였다면 자칫 식상하고 교훈적으로 느껴졌을 법한 '타인에게 다정하라'는 메시지가 이 영화에서 먹혔던 것은 유독 다정함이 가진 강력한 균형 감각이 빛을 발한 덕분이다. 영화는 봇물 터지듯 불규칙하게 뻗어나가는 힘의 방향에 역행해 다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제압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선택했다.


  뭐랄까. 타오르는 불길에 물세례만을 흠뻑 갈기는 것이 아니라, 고운 흙을 뿌려 불길이 멎은 이후, 잿더미가 될 땅 위를 재건할 토양을 마련하는 것까지 생각했달까. 영화의 다정함은 한 가족의 재난 그다음 이들에게 펼쳐질 삶까지 생각하는 선견지명으로 더 큰 감동을 선사했다.     



다정함에도 뾰족함이 필요


  하지만 다정함에 담긴 곱고 선한 의지, 올바른 가치 등에 천착하게 되면 자칫 개념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겠다. 다정함은 마냥 그렇게 둥글둥글한 것이 아니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다정함은 우리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최근 다정함이 냉철하고도 정확하게 상대를 향하면서도 그 뾰족함이 누구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는 좋은 사례를 하나 알게 되었다.


  2023년 10월. 프리랜서로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으며 개인적으로 몸도 마음도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쉴 때만큼이라도 제대로 도파민 디톡스와 양질의 인풋을 위해 유튜브 알고리즘을 최적화시켰다. 누르고픈 충동이 솟구치는 아찔한 썸네일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 일주일쯤 꾹 참고 견딘 결과, 세 가지 갈래로 알고리즘을 필터링할 수 있었다.


  플레이리스트, 북튜브, 그리고 인터뷰. 이 중 원하는 톤의 콘텐츠들이 뜨도록 최적화하기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터뷰였다. 인터뷰는 콘텐츠 카테고리가 아니라 하나의 포맷이다 보니, 내가 관심 가질 만한 창작자, 브랜드,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터뷰 위주로 뜨도록 만들기까진 꽤나 공이 들어갔다.


  그렇게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나를 인도한 곳은 EO채널의 '최성운의 사고실험'이었다. 이미 EO는 구독해서 종종 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이 시리즈는 내 알고리즘에 뒤늦게 잡혔다. 처음 접했던 건 웬만한 한국인의 한국어도 부끄럽게 만드는 고급 한국어 능력자 '타일러'의 인터뷰였다. 여기서 나는 생전 처음 인터뷰이(interviewee)보다 인터뷰어(interviewer)에 더 집중하게 되는 인터뷰를 경험했다. 인터뷰어의 에고(ego)가 강해서? 인터뷰이보다 더 말을 잘해서? 둘 다 일 수도 있겠으나,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고 소화해 그에 맞춰 최적의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인터뷰이가 자기 얘기를 신나게 하도록 유도해 내는 인터뷰어에게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어이자 이 시리즈의 기획자인 최성운 PD의 역량은 그 다음, 그 다다음 콘텐츠에서 오히려 더 크게 터졌다. 조회수만 보면 송길영 박사의 콘텐츠가 제일 대박을 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사업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아티스트 지올팍', 고등학교 재학 중 개발한 어플로 일찍 성공을 맛본 '대표 김현준'의 콘텐츠 역시 각기 다른 관점에서 빼어난 인터뷰 기획의 승리라고 평하고 싶다. 그리고...미친 티키타카와 고퀄리티 유머를 자랑하는 아티스트 그룹 미스치프와의 인터뷰는...공개된 지 한 달쯤 된 것 같은데, 그냥 너무 좋아서 여전히 밥 먹듯 돌려본다.

     

  콘텐츠 별로 하나하나 어떤 것이 좋았는지에 관해 상찬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으나, 다시 하려던 얘기로 중심을 옮겨와 보자. 나는 그의 다정함에서 특유의 '뾰족함'을 본다. 물론 인터뷰이에게 날을 세워 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허나 그의 인터뷰에는 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기운이 형성되는 시점은 언제나 인터뷰이들이 처음 한 두 개의 질문을 받은 뒤부터다. 그때부터 인터뷰이들은 지각한다. 나에게 오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오늘 나와의 대화에 100%를 넘어 200% 준비되어 있다는 걸.


‘이것’은 최성운 PD의 '뾰족한 다정함'이 아닐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이 나에 대해 최대한 공부할 수 있을 만큼 한 상태이며, 거기에 맞춰 기초적인 질문을 넘어,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중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흐뭇한 부담'을 낳기 마련이다. 거기서 비롯된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자신을 쿡쿡 찔러오면, 누구라도 더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형성된 몰입은 더 좋은 답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인터뷰어로서 최성운 PD의 다정함은 상대에 대한 꼼꼼한 사전 조사와 현장에서의 경청을 통한 존중과 배려에서 나오고, 뾰족함은 그 존중과 배려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적당한 도전의식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데서 나온다.  


  뾰족한 다정함은 특히나 우리 창의노동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주변 동료와의 네트워크 역시 더 이상 인정(人情)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얻는 시대다. 오늘날의 다정함은 함께 일할 사람에게 얼마나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는, ‘최성운의 사고실험’이 더없이 잘 입증한다. 이런 식의 뾰족하고도 다정한 콘텐츠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절로 인터뷰어로서 인터뷰가 마려워진다..!

 



  꼭 콘텐츠 제작의 내막을 잘 아는 것 마냥 떠들었지만, 아쉽게도 최성운 PD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아직은.


  나도 어디 나가선 다정함으로 크게 밀려본 적은 없는데, 가까운 미래에 그와 다정함으로 한 번 박 터지게 낯 뜨거운 대화를 이어갈 날을 기대해 본다. 동시에 시리즈의 다음 행보도 기대해 본다. 내 알고리즘은 여전히 인터뷰에 최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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