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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w We C Jan 03. 2024

서사로 더는 주목받지 못하는 세상

서사의 진정성 그 넘어에는


서사에 희석된 서사


  팔로우하는 인지도 높은 인플루언서 한 명을 떠올려 보자. 콘텐츠 분야도, 활동 플랫폼도 상관없다. 대신 활동 한지 6개월은 넘었고 얼굴을 공개한 분으로. 그분의 콘텐츠 히스토리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중에 자신의 과거사를 언급하면서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콘텐츠가 단 한 개도 없는 케이스가 있다면 브런치에 내 인생 굴욕 사진을 공개하겠 꼭 제보...부탁드린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는 물론 창작물을 홍보하는 아티스트들까지, 하나같이 자기 이야기를 선보이기 분주한 시대다. 누구 하나 아픔이 없었던 적이 없고, 아픔을 딛고 일어선 드라마틱한 계기 역시 없는 경우가 없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의 삶이 뚜렷한 기승전결로 정리될 수 있음에 놀라고,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내밀한 자기 이야기를 공적으로 발표하는데 거리낌 없음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러나 막상 되짚어보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고만고만한 공식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흐름은 물론이고 강세를 주는 부분 역시 닮은 경우가 많다 보니, 언젠가부턴 새로운 콘텐츠를 봐도 봤던 것을 또 보는 듯한 피로감이 들 수밖에.


  『피로사회』로 이름을 알린 한병철 작가의 신작 『서사의 위기』는 우리가 번번이 느끼는 이 피로감의 정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저자는 모든 개인의 이야기가 특별하다고 여기려 하면서, 실상 어떠한 이야기도 특별하지 않게 된 현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서사'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경험의 산물로 시대를 연결하는 '지혜를 포함하는 지식'인 한편, 오늘날 서사로 불리는 것은 세상에 전시된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데이터)'에 불과하다. 서사로 남발되는 정보의 범람으로 경쟁적인 자본주의의 자장 아래 진짜 서사의 가치는 희석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병철은 SNS를 통해 확산되는 특유의 스토리텔링을 '스토리셀링'으로 명명한다.


  저자는 이 위기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벤야민과 프로이트 등 세계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한다. 이는 책의 설득력을 높이는 동시에 떨어뜨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저명한 지식인들이 남긴 말의 권위에 과도하게 기대며 이를 치트키처럼 써버린 듯한 서술 방식이 불편했다면...너무 프로불편러인걸까. 더 이상 서사가 빛나지 않는 시대임을 호소력 있게 비판하기 위해, 작가부터 타인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 자신의 진솔한 언어로 쓴 서사를 일부라도 담아냈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다.


  그럼에도 '모든 개인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퍼스널 브랜딩이 마치 하나의 시대정신처럼 과열되고 있는 양상에 기분 좋은 찬물을 끼얹는 책이었음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서사의 진정성을 믿는


  한편, 서사의 위기론이 무색하게 비슷한 시기에 서사가 가진 부동의 힘을 강조한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시대의 마음을 캐는 자타칭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 작가의 신작『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는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되어 독특한 서사를 만드는 '핵개인'에 관해 말한다. 핵개인은 가부장제와 관료제가 해체된 탈권위 시대의 새로운 개인을 표상하며, 기성 시스템을 답습하기보다는 새롭게 규칙을 만드는 용기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런 정의만 놓고 보면 우리 시대의 개인을 '핵개인'이라는 이름 아래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책의 독특한 미괄식 구성상(핵개인을 본격 정의하는 장이 마지막에 배치돼 있음) 끝으로 향해 갈수록 핵개인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한결 선명해진다. 저자가 바라보는 핵개인이란, 현재 우리 주변에서 두드러지는 개인들의 종합적 경향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앞으로 모든 개인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가깝다.


  우리 시대에 내려진 과제로서의 핵개인을 제안하며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흥미롭게도 핵개인의 자립성이 아닌 '연결성'에 있다. 핵개인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강조되는 건 기술 발전에 따라 자기 주도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가능한 자립과 개인의 창조적 재능 확장을 위해 상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물론 이 네트워크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의 집단모델과는 다른 것으로, 핵개인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가운데 각자의 생존을 위해 연대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친구와 표지 삽화의 의미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꿈보다 좋은 해몽이 있는 분?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 대부분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을까. 무려 개인 앞에 '핵☢️'을 접두사로 붙이면서 새롭게 정의하려 했던 개인의 개념은 부정적일 것이라고. 하지만 개인화가 극도로 심화된 풍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할 거라는 확신 어린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신 이 책은 탈권위화의 물결 아래 연대와 포용으로 뭉친 개인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우리 시대 개인의 잠재력을 다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진정성'의 이름으로.


  저자는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고, 고유성은 축적의 시간을 거쳐 진정성으로 나아간다고 밝힌다. 즉, 진정성은 개인의 서사가 가닿는 최종 단계이자, 타인과 매끄럽게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성의 탈을 쓴 이른바 '가짜 서사'의 수요 없는 공급이 SNS를 장악하는 시대에서 진정성은 섣불리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정성의 진정성이 극도로 오염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저자가 그럼에도 진정성을 힘주어 말하는 것은 냉소적으로 보면 나이브해 보이나, 좋은 서사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서사의 진정성 그 넘어에는


  여기까지만 보면 서사를 향한 한병철과 송길영 작가의 입장은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서사의 진정성에 관한 한, 두 작가의 입장은 하나로 수렴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진정성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서사가 가지는 강한 파급력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과연 오늘날 서사의 진정성은 진정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급조하지 말고 꾸준히 축적해라', '과장 없이 진실하게 다가가라'처럼 누구라도 말할 법한 상식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은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는 역시 말보단 행동, 이론보단 실천에 주목할 수밖에. 2023년 개봉된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로 두고두고 거론될 스티븐 스필버그의 역작 <파벨만스>는 영화란 무엇이고, 나아가 서사란 무엇인지를 매력적으로 질문한 일종의 메타 영화였다. 스필버그의 실제 성장 실화에 기초한 이 극영화는 언뜻 주인공의 유년기부터 청년기를 선형적으로 다룬 익숙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칫 뻔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도 스필버그는 자신만의 엣지를 놓치지 않는다.


주인공 파벨만스(Fabelmans)는 이름 그 자체로 '이야기꾼'을 뜻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감독이 슬쩍 열어둔 사고 실험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의 서사 안에서도 여러 층위의 서사적 문을 여닫으면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유영하면서.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작동하는 서사를 따라가는 가운데, 영화 바깥에서 작동하는 현실의 서사를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안으로 당겨와 연결 짓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영화감독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청년 파벨만스의 서사에서 관객들은 파벨만스라는 스필버그의 그림자를 보며 어디까지가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적 허구일지 가늠해 보게 된다.  


  실화 기반의 영화라면 당연한 사고 작용이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경우, 여타 실화 기반 영화와는 분명 차별점이 있다. 실존하는 주인공의 삶의 여정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계의 거장이라는 점이다. 


  관객들은 파벨만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알고 경험한 스필버그와 그의 영화(서사)들을 적극적으로 연결 짓는다. 훗날 스필버그가 이룬 업적과도 연결 지어 보고, 어린 시절 향수에 잠겨 자신이 접했던 스필버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관객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거듭날지 알 리 없는 어린 파벨만스의 재능과 통증을 엿보며, 스필버그라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결말을 거꾸로 뒤집은 채 이리저리 해체해 보게 된다.


  이렇게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현실의 토대 위에 진위를 분명히할 수 없는 허구를 교차함으로써, 진정성 있는 서사를 넘어 스스로를 '사유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 공간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구루(guru)의 경지에 오른 이야기꾼(파벨만스)이 각 잡고 펼치는 이야기의 클래스는 이 정도구나,, 하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동시에, 누군가의 과거가 단지 추억팔이에 그치지 않고, 이른바 '오래된 미래'가 되어 억지로 부여한 진정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호소력을 갖출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스필버그표 서사의 진정성은 명실상부 스필버그이기에 가능했단 사실은 짚고갈 수밖에. 누군가 그의 서사 문법을 아무리 잘 흉내낸다 한들, 비슷한 수준의 진정성과 참신함을 이끌어내리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서사 넘어에 공간을 창출 수 있을 정도의 노련함은 풍부한 경험 없이는 아무나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그래서 <파벨만스>를 대안적 서사의 일례로 간주하긴 무리겠지만, 지독한 서사의 과잉 속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사례가 아닐는지.

  

  정말 더 이상은 참신한 서사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처럼 이미 세상이 좋은 서사로 가득한 레드오션이라 느껴질 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한 번만 더 치열하게 고민해 보면 어떨까.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잔상을 지워내고, 생각의 지평을 아예 다른 차원에서 펼쳐본다면, 벼랑 끝에서 또 새로운 서사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진 않을지,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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