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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w We C Jan 12. 2024

육각형 인간, 매력적으로 패배하는

실패를 나누는 용기


육각형 인간이란 실체 없는 실재


  '육각형 인간'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대충 균형 잡힌 인간상을 나타내는 표현쯤으로 짐작했다. 어느 한 귀퉁이만 특출 나게 돌출되거나 함몰된 못난 방사형 그래프를 떠올리며, 그렇게 부분적으로 치우치기보단 모든 요소가 고루 균형을 맞추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러다가, 『트렌드 코리아 2024』에서 이 개념이 어떻게 통용되는지 분석한 걸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두 가지 측면이었다. 일단 육각형 인간의 요소에 개인의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에 놀랐고, 그중 한 요소라도 꽉 차 있지 않은, '갓벽'한 상태가 아니면 육각형 인간이 아니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다지도 허들이 높은 인간상이라니. 그런데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최고의 자아'를 주로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좇고 있다는데, 과연 그 진단이 온당할까. 책에서는 이 현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오묘한 분석을 내놓는다. "육각형 인간 트렌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흔들리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활력이자 절망이면서 놀이다."


  바꿔 말하면, 육각형 인간을 향한 동경과 찬탄이 실은 사회적 순응보단 전복에 가깝고, 테제이자 안티테제로써 우리 시대가 이 개념을 하나의 유희거리처럼 저글링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관점에서 어쩌면 새로운 문화 현상을 밈의 형태로 재생산하고 소비하는데 특히 익숙한 Z세대와 ZALPHA(잘파)세대에게 육각형 인간은 그다지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요소가 골고루 그래프의 중심에 가까운, '작고 소중한' 육각형도 인정해 줘...


  하지만 '갓생'과 '갓벽한 인간'을 웃어넘기는 사회 분위기 이면에 내재된 절망의 정체에 대한 예리한 통찰 역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앞서 육각형 인간에서 내가 놀랐던 대목으로 밝혔듯, 이제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요소에는 개인이 선천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집안, 외모, 자산(부모의 경제력 기준)의 영역까지 포함된다. 물론, 책에서 예로 든 여섯 요소는 설명하는 대상이나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지만, 이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마저 흠결이 되며, 완벽한 인간이라는 가혹한 이데아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인식이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낸 배경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저자들은 그 배경에 대한 깊은 고찰로 나아가진 않은 듯하다. 다만, 이 현상을 관통하는 인상적인 비유를 다음과 같이 든 바 있다. "더 이상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흙수저 신화'가 각광받지 못하고, 곧장 '완성형 아이돌'을 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근거로 고려해 볼 만한 사회적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패턴화 된 서사가 SNS에 무분별하게 쏟아지자, 일명 '빈곤 포르노'에 대한 신뢰는 낮아지고, 피로는 높아진 점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앞뒤 맥락(context) 없이 자극의 역치만 한껏 끌어올린 ‘대 숏폼 콘텐츠 시대’에서 타인의 구구절절한 서사에 귀 기울일 여력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다.


  새로운 미디어 소비 형태 사이에서 탄생한 육각형 인간은 어쩌면 상상 속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유니콘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지난한 성장통을 겪지 않은 티 없이 맑고 고고한 유니콘을 보며,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발동시키지 않는다. 애초에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종이니,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육각형 인간은 주변에 실재(實在)하고 있지만, 실상 SNS를 벗어난 곳에서 그 실체(實體)를 마주한 적 없는(혹은 마주하기 극도로 힘든), 이를테면 재벌 3,4세들을 지칭한다. 그 정도로 타고난 집안, 재력, 외모 등 모자란 게 없는 레벨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육각형 인간에 낄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극강의 사회적 장벽이 공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갓생에는 질문이 없다


  한편, 육각형 인간을 유니콘으로 여기지 않는 젊은이들도 있다. 성공하려면 모름지기 '노오오력'이 필요하다는 마인드셋을 가정과 학교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성장한 M세대들이다. 아마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단 걸 희미하게나마 믿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이들은 유튜브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을 통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평범했던 또래들이 급속도로 경제적 자유, 문화적 지위를 성취하는 사례들을 지켜보며 강력한 동기부여를 얻는다. 이와 동시에, 요즘 회자되는 유형의 육각형 인간은 아니지만, 자신이 상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육각형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선다.  


  결의에 찬 M세대들에게 갓생은 한낱 유희거리일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역전시키기 위해 선택한 진지한 현실이다. 그들은 비장한 각오로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부터 미라클 모닝으로 하루를 열고, 유명한 자기 계발서들을 탐독하며,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권장되는 것들을 실행 리스트에 옮겨 적고 이에 맞춰 성실히 살아본다.


  체감상 그중 열에 일곱은 자신이 짠 실행 리스트에 자신이 압도되어 일주일 안으로 포기한다. 그렇게 갓생은 결의에 찬 남은 셋의 레이스로 좁혀진다. 대학 시절 나 역시 그중 하나로 잠시나마 뛰어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뛰면 뛸수록 스스로가 더 멍청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였을까.


국내에 갓생 열풍을 이끈 김유진 변호사(좌)와 이를 성공적으로 브랜딩한 GS25(우), 대표적인 갓생 사례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참을 뛰고 서야 정작 무얼 위해 이렇게 뛰고 있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뚜렷한 커리어 목표 없이 앞날에 대한 걱정만 앞서던 미대생이었다. 막연히 불안을 잠재우고자 다재다능한 육각형 인간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왠지 나중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며 이런저런 기술들부터, 심신의 안정에 좋다는 습관들까지 섭렵하기 바빴다. 정작 언제 어떻게 이것들을 쓸 수 있을지는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스스로 설정한 계획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오늘 하기로 결심한 것들을 다 끝냈다는 안도감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정작 이렇다 할 유의미한 성과는커녕 어느덧 방향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발견했다. 결국 그때 내가 택한 갓생은 나로부터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탐색하도록 질문하는 힘은 빼앗고, 주어진 삶을 노예처럼 살아내는 맹목적인 힘만 남겼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갓생을 대책 없이 살아낸 한 바보의 특수 사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와 달리, 자신의 목표에 맞춰 현명하게 갓생 로드맵을 설계한다면, 충분히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덧붙여, 자격증이나 채용시험처럼 정해진 목표가 명확한 것을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제한된 사고 반경 안에서 계획대로만 사는 폐쇄적인 포맷의 갓생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런 형태의 갓생이 우리 창의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기본적으로 성실한 삶의 태도야 창의노동자들의 생산성에도 매우 중요하겠으나, 무엇이든 잘하고 싶다는 일념 하에 이것저것 배우기 바쁘고, 잠깐의 나른한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빽빽한 일상을 지속적으로 보낸다면, 창의적인 아웃풋을 생산하는 데 있어 도움보다는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 갓생을 살며 '육각형 인간'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모종의 압박감이 창의성의 자유롭고 유연한 속성과 상충하진 않는지 우려된다.



실패를 나누는 용기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말하고 싶다. 앞서 선명한 목표 없이 무지성으로 열심히 살기만 했던 것이 과거 나의 갓생이 실패한 원인이라고 했으나,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서서히 직감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오롯이 혼자서 이를 해결해 나가려 했다. 누군가와 이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에는 별다른 성과도 없었던 상태라 부끄러웠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지키고자 이 고민을 숨긴 채, 지인들 앞에선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자신에게 찾아온 실패의 고통과 분을 꺼내지 못하고 홀로 삭였던 것이 진짜 패착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갓생의 실패 여파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찌저찌 취업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자신의 크고 작은 성공을 얘기하는 것보다, 부끄러운 실패를 가감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용기가 더 매력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예상외로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갑자기 이 무슨 오그라드는 고백인가 싶겠지만, 조금만 참고 따라와 달라...)


  대학 졸업 후 문화예술계 기획 직무에서 일하며, 나는 육각형 인간이 되겠다는 섣부른 결심 같은 건 접게 되었다. 괜한 겸양의 제스처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가 뛰어나려 하는 것이 과욕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완벽할 순 없어도 내 직무에 꼭 필요한 부분은 보충하고자, 회사 밖 여러 커뮤니티를 두드려 보았다.


  지역 기반의 북 커뮤니티부터, 단체로 즐기는 운동 커뮤니티까지 각양각색의 니즈에 따라 모인 이들과 어울려 보며, 네트워킹의 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미처 회사에서 털어놓지 못했던 패배의 기억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서로 지혜를 나누고 도움이 될 유용한 정보도 얻었다. 때로는 실질적인 도움은 못될지언정, 한 마디 위로라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네트워크들이 늘 잘 굴러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돌아이 총량의 법칙은 과학이다. 그렇지만 이런 네트워크에 참여함으로써 솔직하게 자신을 세상에 던져보는 경험은 막연히 더 발전하고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단순히 인맥을 넓히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런 커뮤니티를 찾아 나서는 건 훌륭한 선택지다.


  이처럼 건강한 공유가 이어지는 네트워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최근에는 멤버들 간에 더 좋은 케미가 폭발할 수 있도록 뾰족하게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한 커뮤니티 겸 플랫폼들도 눈에 띈다.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각자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두 커뮤니티를 소개해 본다.  




사이드; 다능인을 위한 커뮤니티


  먼저, '사이드(SIDE)'는 독립 마케터이자, 기획자, 작가, 유튜버 등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정혜윤(유튜브 채널: 알로하융)이 운영하는 플랫폼 겸 커뮤니티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다능인을 위한 커뮤니티"라는 브랜드 카피는 솔직히 듣자마자 직관적으로 지향점이 다가오진 않아서, 정리된 콘텐츠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자기 분야에서 활발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의 인터뷰, 전문적인 직무 능력을 요구하는 구인 프로젝트 게시판 등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지칭하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사람들은 꿈 많은 ENFP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구나. 이미 '자기 분야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뒤, 다른 분야로 시야를 확장하는 사람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자기 브랜드를 소개하는가. 다소 추상적이긴 해도, 정혜윤은 감각적인 언어로 플랫폼의 타깃을 재치 있게 포장했다.


Multipotentialites(다능인)을 위해 기획된 SIDE(사이드). 이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색을 쓰고 있음에도, 랜딩 페이지를 세련되게 잘 뽑으셨다.   


밑미; 소박하고 단단한 리추얼


  또 다른 사례 '밑미(meet me)' 역시 인상적이다. 이 플랫폼은 뭐랄까, 자기 위치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들보단, 자기만의 중심을 잡아가고 싶은 우리 시대 청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집중한다. 혼자 하면 번번이 의지가 꺾여 이어가기 힘든 갓생 ‘리추얼’(의식 활동)을 함께 실천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기획되어 있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어려운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리추얼 메이커의 리드에 따라 매일 5분 글쓰기, 20분 드로잉 일기 등을 하고, 그 결과를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달리 말하면, 하루 중 긴 시간을 쏟을 필요 없이 가볍게 참여하되,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는 보람을 느끼며 자신감을 찾아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아직 직접 참여는 못해봤지만, 무기력에 빠진 지인에게 글쓰기 리추얼을 해볼 것을 권했더니, 매너리즘을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후기를 들어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귀여운 캐릭터로 진입장벽을 낮춘 밑미(meet me). 너도 나처럼 월 천만 원 벌 수 있으니 퇴사를 권장하는 여느 공격적인 커뮤니티들과 달리 슴슴하고 순둥한 매력이 돋보인다.




  폴인(fol:in)이란 미디어를 통해 최근 읽었던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 썸네일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못 써서 부끄러운 글도 꼭 홍보해요" 그는 짧은 호흡으로 글을 써야 하는 연재노동자로서 자신이 늘 히트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족함까지 만천하에 알리는 걸 피하지 않았다.


  설령 독자가 보기엔 충분히 빼어난 글 같고, 작가 자신만이 느끼는 부끄러움일지라도,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마저 가감 없이 공개를 넘어 홍보했다는 그는 오늘날 무엇이 되었는가. 작은 역사들이 모여, 명실상부 대한민국 M세대 문학 작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과거의 나처럼, 스스로의 실패를 남 앞에 보이기 꺼려하며 자신을 꽁꽁 닫고 있다면, 눈 찔끔 감고 딱 한 번만 가감 없이 나눠보자. (물론 무작정 징징대라는 의미는 아니다..! 톤은 현명하게 잘 조절하시길) 꼭 앞서 언급한 커뮤니티 활동 같은 게 아니어도 좋다.


  가급적 아주 가까운 사람보단 나를 잘은 몰라도 이 얘기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아 용기 있게 실패담을 풀어보자. 패배로 뒤엉킨 내 스토리에 상대가 매력을 느끼고, 이에 성심껏 피드백을 해 주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를 짓누르던 쓸데없는 부담과 욕심을 내려놓자.


  어쩌면 그 순간, 벼랑 끝에 서 있던 자신도 모르는 새, 또 하나의 육각형 인간으로 거듭나는 문이 활짝 열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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