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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Dec 24. 2018

<그린 북>

높이 올라가는 것, 자신을 내려놓는 것보다 더 나은 길로 우회하는 영화

※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한 영화 후기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출처: 영화 <그린 북>

영화 <그린 북>은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운전기사 토니 발레롱가,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의 다사다난 여정과 그 속에서 빛나는 우정을 보여주는 2019년을 밝힐 기대작이다.


너무나도 다르다고 했다. 백인과 흑인이라고 해서 다르다는 게 아니다. 성격이 다르고, 두 사람이 살아온 길이 달랐다는 의미이다.


돈 셜리는 가슴속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애초에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토니에게 가족의 안부를 걱정했던 것도 그에게 그러한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품위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차 안에서도 깔끔함을 유지해야 하고, 클래식 음악만을 즐겨 듣는다. 그가 그토록 품위를 지키고자 했던 건 흑인이란 이유로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 아니였을까. 토니가 입씨름하다가 몰래 훔쳐온 행운석은 돈 셜리의 위치와 묘하게 닮아있다. 세상에 있는 많은 돌 중 특별하게 취급되는 그 돌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행운석이면서도 그렇게 분류되어 있는 박스 위에 존재하지도 않고, 평범한 돌 사이에 존재할 수도 없다. 돈 셜리 또한 마찬가지다. 차별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높이 하려 했지만 정작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토니는 한 마디로 '살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일하던 클럽에서 갑부의 모자를 몰래 빼내기도 하고, 상대가 핫도그를 25개를 먹을 때 자신은 26개를 먹으며 50달러를 벌어오는 사람이다. (여담이지만 핫도그를 26개 먹었다는 그의 식성은 뒤에서 벌어질 어마어마한 먹방의 예고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다. 집에서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이들의 이마에 다정한 키스를 해줄 줄 아는 든든한 아버지다. 가족들이 아침을 열며 하루를 시작할 때 토니는 잠을 청하며 내일을 위해 밤을 부르곤 했다. 이렇듯 1960년대를 살았던 평범한 아버지였던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처럼, 집에 온 흑인 노동자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이 마신 컵을 불결하다는 듯이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듯. 많은 생각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에겐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토니가 마땅한 일자리를 찾아 돈 셜리를 만나게 되는 사건은 그에게 두 가지 가치관이 맞물리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질문을 던지는 셈이 된다. 원칙과 품위를 중시하는 돈 셜리. 그와 달리 속임수로 판을 유리하게 할 수 없으면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토니의 행동은 그가 한 말처럼 오히려 더 '흑인스럽다.' 극과 극의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의 만남은 '흑인은 이러할 것이고, 백인은 저러할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일단 깨트리고 시작한다. 돈 셜리의 세상으로 들어온 토니는 여태껏 그가 살아왔던, 그가 생각했던 방식과 달리 흑인이 자신의 보스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아시아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성질을 냈던 그가 도리어 그의 우아하지 못한 발음을 지적받게 된다.

출처: 영화 <그린 북>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남부 투어를 위해 일명 매니저가 된 토니에게 영화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흑인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던 그가 두 눈으로 적나라하게 흑인을 차별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어느 바에서,

어느 수영장에서,

어느 양복점에서,

어느 레스토랑에서,

그를 초청한 곳에서 마저도.

돈 셜리의 뛰어난 실력을 보며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무대 뒤에서의 슬픈 눈빛을 보며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토니는 이러한 차별들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차차 본연의 마음으로부터 분노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향한 차별을 보며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토니에게 영화는 이내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셜리를 보호하는 토니에게 한 경찰은 흑인과 더불어 이탈리아계 인종 또한 우월한 백인 사회의 바깥으로 몰아내며 모욕적으로 대우했다. 그저 우리 사회에 일부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는 차별, 이를 넘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받는 차별,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받게 되는 차별.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 <그린 북>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토니에게 수 차례 질문을 던지며 사람에 대한 차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관념을 심도 있게 관찰한다. '관례가 그렇다'느니, '전통이 그렇다'느니 하는 어불성설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외부에서 비로소 나에게로 향하는 차별의 잣대들을 보여주며 우리가 생각했던 가치관 사이 어딘가 들어맞지 않는 그 빈틈을 간파하고, 우리의 마음으로 그걸 느끼게 한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출처: 영화 <그린 북>

이 영화는 곳곳에 재미있는 유머 코드가 숨어있어 보는 내내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사실 중반부에 다다르면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게 되는 점도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영화가 인종차별의 여러 상황들을 나열해서 보여주곤 하지만 무언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영화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자면 이러한 전개마저도 그 시대의 현실을, 어쩌면 변하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연출로 작용한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러한 반복적인 상황들 자체가 방심하고 있던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같다.


이제껏 토니에게 질문을 던졌던 영화는 이 상황을 보고 있는 관객에게 한 번 더 질문을 던진다. 한 경찰차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폭설 속에서 안간힘을 쓰던 두 사람을 부르던 장면에서 말이다. '아, 저 경찰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겠지.' '또, 그런 식으로 판단할 거야.'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가 그들을 불렀던 건 타이어가 한쪽으로 기울었던 차의 상태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차별적인 상황들을 두 눈으로 보고, 또 경험하게 될 때 남들의 시선만큼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와 동시에 차별은 우리 마음속에서 응어리처럼 자리 잡게 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마저도 어림잡아 판단하게 된다. 영화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붙잡고 있다.

출처: 영화 <그린 북>

토니와 셜리, 이 두 사람의 여행과 우정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그게 마땅한 분수라 생각하며 낮은 곳을 바라보던 토니에게 셜리는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무릎을 털고 일어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이토록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을 바라보던 셜리에게 토니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짐작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 지를 깨닫게 해 줄 소중한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큰 행운일 것이다.

출처: 영화 <그린 북>

겉으로는 상대를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차별을 정당화하고 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유색인종들의 여행 지침서인 '그린 북'으로 통하는 가이드 내용이나, 틀을 깨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두루뭉술한 변명들을 마주하면서 '말'이란 게 얼마나 진심 하나 담겨 있지 않은 허무맹랑한 것들 투성이인지 깨닫게 된다. '흑인'이라 하거나 '백인'이라 특정 짓는 이름들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 지 실감한다. 영화 <그린 북>은 세상에 들어찬 이 '말'들 속에서 혁명적인 변화와 기발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 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을 크게 변화시키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를 실망시키는 백 마디의 '말'보다 마음에 진정으로 와 닿는 '진심'이 하나 있기 마련이다. 엄청난 걸 바라지 않아도, 나의 진심이 담긴 연주를 들어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용기 내어 무대에 오르길 기원한다. 세상이 던지는 힐난 섞인 말들에 일일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고, 설득하기 위해 마주 앉지 않아도 된다. 그게 이 영화가 우리를 위로하는 방식이다. 셜리와 토니가 차를 타고 다녔던 것처럼 그저 앞을 보고 함께 가면 된다. 그 여정 속에서 차가 막히기도 하고,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기도 하겠다. 천둥이 내리치고 하늘에서는 눈과 비가 엄청 쏟아지기도 하겠다. 서로를 탓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일일이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이 들면 운전대를 바꿔 잡으면 그만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나요.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오늘 같은 날은,

조금은 용기를 내봐도 괜찮은 날이 아닐까.

그래도 용서가 되는 날이 아닐까.


그러니, 가세요.


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면

바퀴를 다시 바꿔 끼우면 됩니다.

늘 그랬듯이 앞을 보고 떠나세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평점: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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