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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Jul 10. 2018

<잉글랜드 이즈 마인>

고요한 밤의 끝자락에서야 만날 수 있는 꿈을 이야기하는 영화

인생은 그 따분함으로 볼 때 피할 만하다.
늘 원했던 세계에 닿을 때까지
잠드는 게 나을까.
출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턴테이블 위 LP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픽업이 제 자리를 찾아 음악이 시작할 때까지 잠깐의 시간이 필요하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바로 레코드판의 음악이 흐르기 전, 그 정적 속 고요함을 보여주는 영화다.


더스미스. 브릿팝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한 밴드가 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세무사 일을 하며 현실과 타협하려 했지만, 음악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티븐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는다. 사실 누군가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여느 영화와 달리 우리는 그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낯낯이 보여주려 하다 보니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을 상실한 채 그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배열하는 데에만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대기적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대한 이름 뒤에 가리워져 있던 그 사람의 방황의 시간들을 끌어내어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에 우리는 그들의 지난날을 보며 우리의 오늘 날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추억이 될 영화이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더스미스를 알게 될 기회다. 무엇보다도 영국 맨체스터 도시의 다소 음울한 분위기와 스티븐을 둘러싼 조명에 따라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고 있어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잔상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또 간간히 피식 웃음을 짓게 하는 장면들도 많았다. 스티븐에게 호감을 보이는 크리스틴이 자기 집에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라고 가라며 유혹하자 그는 그녀의 집을 문 밖에서 힐끔 보더니 이내 닫아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장면을 보면 스티븐의 단호한 마이웨이는 결코 당해낼 자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과 가까워질 때마다 점점 들떠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나 일하면서 몰래 글을 쓰던 스티븐이 동료에게 들킬까 봐 노트를 옷 안으로 몰래 숨기는 모습, 누나를 무심하게 놀리는 장면이나 시간이 흘러 성공한 빌리의 밴드가 기사에 실리자 이를 보던 스티븐이 잠시 안쓰러워질려던 순간 휴지통에 신문을 꾸깃꾸깃 버리는 장면들도 기억에 남는다. <덩케르크>에서 열연을 펼쳤던 잭 로던의 색다른 연기와 더불어 시련의 순간에도 마주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일상 속의 유쾌한 순간들을 소소하게 잘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스티븐 모리세이. 넌 어떻게 기억될래?
출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스티븐 패트릭 모리세이의 방황하는 시절이 낯설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무명의 천재로 스스로를 평하지만 정작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자꾸만 무너지는 스티븐. 방 곳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자신이 써 내려가는 글들이 흩어져 있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음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것뿐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불평만을 늘어놓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제대로 세상에 당당히 나서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론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내가 원하는 행복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망설여지는 그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영화에서 가장 가슴 떨렸던 장면은 빌리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마이크를 처음 잡지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스티븐의 모습이었다. 매번 자신의 방에서 문을 닫고 노래 부르던 그가 누군가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는 것은 세상에 한 걸음 나서기 시작한 중요한 순간이다. 그의 첫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그는 유원지에서 서성거리다가 행인에게 얼굴을 얻어 맞고, 엉겁결에 회전하는 놀이기구를 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타며 그는 또다시 글을 쓰고, 가사를 쓴다. 그렇게 그는 돌아가는 레코드판 위에 올라타 자신만의 음악을 세상에 내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잘 돌아가던 레코드판도 가끔은 튕길 때가 있다. 그의 공연을 보고 런던에서 그와 빌리를 데뷔시켜주겠다는 자가 등장하며 그의 삶은 그대로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드라마틱하게도 회사에서는 빌리만을 캐스팅하겠다고 제안을 바꿨고, 스티븐은 절망에 빠져 몇 달을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지냈다. 하루 종일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것도 모자라 밤에 창으로 은근히 새어 나오는 불빛마저도 그는 천막으로 가려버린다. 그런 그가 방황 끝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그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며 말씀하신다.


'너만의 세상을 만들어. 오직 너 자신만이 유일한 너야.'


스티븐은 잡지에 글을 싣기 위해 매번 밴드 공연을 찾아다녔지만 사람들이 왁자지껄 무리 지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하지 못하고, 어색해한다. 사람들의 모습을 어지럽게 잡는 쇼트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용기를 얻은 그는 또다시 공연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복잡한 무리들 사이에서 홀로 헤드셋을 끼고 그의 세상을 만든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죽도록 싫었던 그가 세상을 외면하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현실 앞에 당당히 선다. 그리고 입가에 지어낸 옅은 미소는 그가 진짜 세상에 나설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처음에는 빌리만 밴드에 합류하여 데뷔하게 되는 상황을 보며 세상이 이리도 무심할 수가 있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음을 다잡은 스티븐이 리가 그랬던 것처럼 밴드 멤버를 구한다는 공고를 붙이고, 그의 방에 들어온 조니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모습에서 과거 빌리의 모습이 얼핏 겹쳐졌다. 이제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직접 발로 움직이는 스티븐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스티븐만 보인 것은 아니다. 스티븐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빌리의 성공이 쉽게 얻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빌리도 그만큼이나 많은 방황의 시간들을 견뎌왔던 게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 눈에 쉬이 보이지 않을 뿐, 남몰래 꿈을 향해 수 없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시련이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니기에, 그래서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나.

출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영화 속에서 조니가 처음으로 연주를 하는 순간, 스티븐이 지난날 머물렀던 거리와 공연장 그리고 버스의 모습을 몇 초간 비춰준다. 아무것도 없이 이토록 조용한데 그때의 나의 세상은 왜 이리도 시끄러웠을까.


스티븐의 인생에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소중한 친구 린더와의 우정이 있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늘 옆을 지켜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며,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반환점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을 법한 '조니'와의 만남처럼 예상치도 못한 순간 내 운명을 뒤바꿀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성공이나 꿈이란 건, 더 나아가 행복은 기다린다고 순순히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생의 최고의 용기를 내어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모든 행운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누군가에겐 더 힘들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도는 남들보다 느릴지 몰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그 차이를 스스로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하나 분명하지 않기에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꿈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실패하더라도 당당히 세상에 발을 내딛어보자.


영화는 유난히도 이리저리 부닥치는 물의 흐름을 오래도록 비춰준다. 물의 모습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도 외로운 길을 걸어왔던 이 한 남자와 많이 닮았다. 그를 잘 표현하고 있는 시 한 편을 인용하고자 한다.

<물은> 장혜승

물은
둥근 기억을, 모난 기억을,
피고 지는 꽃들을 떨쳐 버리고 간다

자신을 걸러내며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간다

물은
되돌아오지 않는 길을 택한다
연민도, 증오도 오래 품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뭉쳐진 곳은
많을수록 고요하다


스티븐. 뭘 기다리는 거야?
출처: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

린더가 런던으로 떠나며 이런 말을 한다.


"London is mine!"


더스미스의 <still ill>이라는 곡에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England is mine'이라는 가사가 있다. 힘든 순간이 올 때면 이 세상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자. 모든 고난과 시련과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만 같은 침체기 속에서도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내 세상이 빛을 발하기 위한 잠깐의 고요함일 뿐이라 생각하자. 그리고 그 시간의 길목에서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숱한 인연을 만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에

고요한 밤이 필요하다.


고요한 밤이 있어

황홀한 꿈도 꿀 수 있는 법이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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