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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Aug 18. 2018

<더 스퀘어>

현대인 사이를 가르는 무수한 선을 전시하는 영화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눠 가진다.
출처: 영화 <더 스퀘어>

<더 스퀘어>는 끊임없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정말 열이 받아서 화가 나게 하는 불편함이 아니고, 은근히 신경에 거슬리는 불편함이다. 자다 일어나서 어정쩡하게 인터뷰를 하러 가고, 인터뷰어는 어수선하게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앤과의 가벼운 하룻밤을 보낸 이후 예상치 못한 그녀의 집착,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데 전시관 내에 들리는 기분 나쁜 소음, 한 작가와의 토크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장애인의 고함소리 등처럼 말이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은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생각보다 긴 러닝타임은 오랫동안 앉아있는 자세를 불편하게 하고, 극장에 늦게 들어온 일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고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며 스크린을 가리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크리스티앙의 찝찝한 표정이 절로 내 표정에도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작은 거슬림으로 자극한다. 그래, 우리는 충분히 예민하다. 그런데, 이토록 예민한 우리는 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쉽게 외면하고 마는가. 이러한 일상의 조그만 잡음에도 불편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당신과 나의 위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바로 <더 스퀘어>를 통해서.


꼬여가는 이야기


출처: 영화 <더 스퀘어>

크리스티앙은 전시의 비전시니, 비전시의 전시니 자기가 써놓고도 헷갈리는 말들로 주무장한 전시회를 열었다. 결국 그가 홈페이지에 적어놓은 글을 풀어서 해석해보면, 이 전시장에 당신의 가방을 놔두면 그것이 예술품이 되느냐는 것이다.


도둑으로 몰린 소년이 사과를 하라고 찾아왔을 때, 그는 무작정 아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뒤늦게 아이에게 보내는 사과 영상에는 어리석은 어른의 무책임한 변명만이 나열되었다. 그는 홍보 업체와의 회의 도중 이런 말을 했다. 단순함에 힘이 있다고. 그렇다. 반면,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실수를 바로 잡을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가 아닌 사회와 기득권층의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그 복잡한 변명은 우리를 여전히 똑같은 상태로 헤메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소지품을 잃어버린 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단한 방법이 아니라 우회해서 선택한 협박이 그를 더욱 꼬이고 꼬인 상황들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엔 자신이 자초한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방을 전시장에 놔두면 그것이 예술품이 되는가. 그 답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가방은 그냥 가방일 뿐이다. 어렵고 우아한 말들로 포장한 가치관과 도덕심은 너무 복잡해서 그 자체로 맥락을 잃어버린다. 


미디어와 자극


출처: 영화 <더 스퀘어>

정사각형(square)을 그려 이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고 선언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이 광장(square)에서는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데 말이다. 크리스티앙 스스로 조차도. 사람들은 구호활동을 하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네모난 신문지 위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노숙자들도 쉽게 외면한다. 크리스티앙은 '더 스퀘어'를 통해 인간의 선(善)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에 드러난 건 인간의 위선(僞善)이었다. 


도와달라는 말에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은 요즘 세상에 잘 없다. 백화점에서 아이들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크리스티앙의 말을 지나치는 사람들이나, 한 밤중에 복도에 울리는 남자아이의 도와달라는 울음소리에도 한 번을 밖을 내다보지 않는 매정한 주민들만 봐도 그렇다. 해봐야 광장에서 한 남자에게 위협을 받던 한 여자가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야 도움을 주려한다. 전시회 만찬 중에 있었던 이벤트 때도 마찬가지다. 유인원이 한 여자를 강간하려 할 때 아무리 도와달라고 해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꼼짝 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움직여야만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움직였다. 유인원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가상의 생존법칙에 복종하고 있는 우리는 짐승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오늘날의 미디어 현상과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영화 속에서는 크리스티앙이 무심코 넘겨버린 홍보 영상이 일으킨 파문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잔인한 내용으로 영상을 만들 수 있냐며 비난을 한다. 하지만 그 사건 이면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하나, 1시간 만에 엄청난 조회수를 차지한 그 홍보영상은 그 잘잘못을 논하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었다. 둘, 평소에는 약자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이 영상에서 아이가 폭발하는 장면을 보며 뒤늦게 약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제서야 행동하기엔 이미 늦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 영상에 책임이 있는 크리스티앙을 욕했지만 사실 그 영상 자체가 오늘날의 현실이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그 영상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게 두 눈에 목격되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현대인들의 진짜 현재를 밝히기에 아주 충분했다.


현대판 네모의 꿈


출처: 영화 <더 스퀘어>

우리가 더 스퀘어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후반부에 크리스티앙의 딸의 치어리더 무대였다. 네모난 무대 안에서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응원하면서 서로를 부축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그려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치어리딩 무대가 끝나고서 감독이 아이들에게 고칠 점들을 조언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치어리더들이 스퀘어 안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스퀘어라는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 안과 밖에서의 이해와 노력과 헌신이 있었고, 실수를 했으면 바로 잡으면 되는 반성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소지품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협박을 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신을 밑바닥에 두고서는 그 위에 선을 그리든, 스퀘어를 그리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협박과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에게도 당당하지 않다. 협박 편지를 누가 꽂으러 갈지 아웅다웅하는 크리스티앙과 직원의 모습처럼 말이다. 반면, 진심을 다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사람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행동은 선량하다. 그의 딸들이 선뜻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한 것처럼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더 스퀘어. 하필 사각형이었다. 둘러보면 세상에는 네모가 참 많은 것 같다. 어릴 적에 자주 부르던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스퀘어는 전시회장 앞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스퀘어는 이 영화를 보는 스크린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횡단보도에서, 무심코 들어서는 건물에서, 지금 앉아있는 이 공간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따라서 크리스티앙이 말하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은 도처에 존재한다. 사람을 향한 선(善)은 임의로 정한 선 안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곳에서 행해져야 한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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