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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Sep 24. 2021

10년 차 직장인과 10년 차 고양이의 대담

출근하기 싫은 어느 날, 두부에게 물었다.

어느덧 직장생활 10년 차가 되었다. 또래들에 비해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해서 주변인들 중 가장 먼저 10년 차가 되었고, 친구와 후배들로부터 한 가지 일을 10년 ‘씩이나’ 하면 어떠냐는 질문을 득달같이 받았다. 승냥이 떼처럼.


'글쎄, 몰라. 나도 모르겠어.'


9년 364일째와 10년 1일째는 고작 하루 차이인데, 사람들이 '10' 이란 숫자에 부여하는 무게는 늘 크다.

거의 10년 차에 다다를 때 즈음이였다. 의무적으로 노동에 쓰이는 시간에 대해 염증이 생겼음을 알았고, 그 염증만큼이나 주체적으로 삶을 운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살아온 ‘9 to 6’의 삶 말고 내 생체리듬에 맞춘 시간. 이리하여 만든 주 2.5일 근무를 3년째 하고 있다. 주변인들은 대부분 주 20시간 근무와 함께 반토막난 월급을 걱정해주며 부럽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또 한편으론 제일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에 그래도 되냐며 반문했으나 ‘그것은 통념’이라며 빈약하게나마 반론을 펼치길 반복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컴퓨터를 켜고 '10년 되돌아봄.hwp' 폴더를 만들었으나, 만들기만 했다. 기본 용량을 넘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다시 주 5일 근무의 삶으로 돌아갈 텐데 사람들의 질문들에 대답하기위한 자기 방어용 파일이 하나 생성된 셈이다. 미래를 첨예하게 설계하는 편도 아니고, 야망이 불타기는커녕 야심찬 하루의 계획도 쉽사리 무너지곤 하는 적절하거나 어정쩡한 ‘나’ 임을 스스로 안다. 하여 10년이란 시간에 대충 버무려진 어설픈 내 경험을 진리인 양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맴돌기_ 쓰다가 녀석들 사진 정리를 한다.


그럼에도 '10년 차'라는 라벨은 당장 '10년 차가 되면 ~다.'라는 어쭙잖은 감상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다.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근래에 들어 대중들의 ‘일’에 대한 본질적 관심도가 높아져 미디어에 직업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00 분야의 10년 차가 된 ~’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이야 ~’ 하는 청자의 탄성이 따라붙는 걸 보면 아까 등장했던 그 승냥이 떼들 같던 주변인들이 모두 잘못됐을 리 만무하다. 분명 5~6년 차 때까지만 해도 대학원, 이직, 퇴사 등등 머릿속 한 구석에 띄어둔 상태였다만 언제부턴가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희미해졌다기보다는 회색에 가까워졌다는 게 더 솔직할 것이다. 여러 가지 색을 섞다가 실패하거나 멈추면 늘 찐한 어디다 쓸데도 없는 회색이지 않나.


어느 오후, 팔레트에 남겨진 물감 똥 같은 회색 인간이 회색 푸념을 늘어놓다가 문득 떠올랐다.

‘두부와 푸코의 삶도 10년을 넘었구나,,,,,,?????!!!!!’


두 동물의 10년은 얼핏 인간의 60~70년의 중간 정도겠지만, 인간의 속도로 10년을 살고 있으니 두부에게 물었다. (둘의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그저 갈려진 이빨과 느긋한 행동으로 나이를 추측했을 뿐이다.)


고뇌 중인 두부 박사
윤 : 두부야 자니, 10년이란 시간은 어떤 의미냐?
두 : 나는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아. 그저 츄르를 먹은 날과 아닌 날로 나눌 뿐.
윤 : 네가 살아온 시간만큼 나는 한 가지 일을 해왔어. 같은 일을 한 지 10년이나 됐는데 여전히 미숙하고, 내가 이 일을 진짜 하고 싶은 건지, 더 좋아하는 일이 있지는 않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다 보니 성인이 됐고 당장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제 앞가림을 해야 해서 시작은 했지.
두 : 나도 내 삶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리고 또 어떻게 될지도 몰라. 삶은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야. 무슨 이야기냐면, 그냥 그런 거라고. ㅋㅋㅋ
윤 : 10년을 살아보니까 어때? 너의 10년과 나의 10년. 글로 쓰려니까 좀 정갈하게 말해줘.
두 : 인간들은 사회인으로서 10년, 유년기 10년, 혹은 입시하느라 뭐 어쨌다 5년, 결혼까지 몇 년 이런 식으로 나눠서 보는 것 같아. ㅋㅋ 근데 좀 어리 석어 보임. 나에게 10년은 전부야. 1년 이어도 전부고. 제야가 나를 컨택했다고 믿는 그 계단에서의 순간도 전부야. 사실 내가 제야를 택한 거지만.
무튼 매 순간이 전부라는 말이지. 생각해 봐. 뉴스를 검색해보면 알지. 갑자기 생을 마감하는 무수한 사건들. 소나기처럼 날아든 소식들. 슬퍼할 틈도 없이 떠난 많은 것들. 그리고 또 새로이 나타나는 것들 모두. 그냥 그게 전부야.





잠시 대화를 멈추고 반추해보기로 했다. 앞으로의 10년과 지난 10년을 두고 저울질해본다. 그대로 흘러도 좋은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나, 여기에 없기도 하다. 시간의 영속성과 무한함 속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유한함을 헤아리며 내일을 두려워한다. 나는 회색 인간이기에 흰고양이의 위로에도 여전히 두렵고 알쏭달쏭하다.

어떻게 살고 죽을지에 관한 것. 다소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난해함은 1도 해결하지 못한 채 결국 두부의 오드아이 속으로 도망친다. 해소는 안 되지만 객관화에 도움이 되는 느낌은 맞다. 싸늘하게 고상한 양반 길고양이의 동공으로 도망치는 것은 그래서 달콤하다.


윤 : 나름 10년 ‘열심히’ 산 거 같은데 왜 이리 아쉬울까?
두 : 뭘 하든 아쉬움이 남을 거야. 전력 질주하고서 되돌아보면 알 수 있지. '좀 더 뛸 걸..' 그러잖아. 토할 거같이 뛰었으면서.. ㅋㅋ. 우매해. 자기 나름의 최선이라는 것도 잘 인정 안 해주는 분위기 무엇? 우매해. ㅋㅋ
너는 ‘나름’이라고 하는 말을 부정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한마디 하겠는데. 그것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야. 매일 밤새며 지내는 제야도, 매일 반나절 이상 뒹굴뒹굴 거리며 사는 당신도, 그리고 먹을 궁리만 하는 것 같은 좀 한량 같은 저 누렁이도. 미모로 먹고사는 나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그니까 츄르 주셈.
윤 : 그럼 나름대로 살아낸다고 해도, 아쉬움이 남을 때는 어떡해?
두 : 아쉬워한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 아쉬워할 시간에 낮잠이나 자. 몽상도 좋고, 햇살을 즐겨. 즐길 수 있는 햇살이란 게 영원하단 보장도 없고, 오늘 맡은 꽃향기가 내일은 안 날지도 몰라. 그냥 지금이 전부라니깐. 순간을 살아봐. 속이 편해져. 아쉬울 게 없지.
그래서 내일 생이 끝나도 나는 좋아.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다가 아쉬움 덜하게 갈 거야. 좋은 걸 찾기 힘들면, 미친 듯이 싫은 것부터 지워봐. 나는 거의 다 지워서 없어. 반대로 이야기하면 좋은 것만 하고 살지. 크~ 인간계의 영원한 과제.
윤 : 고마워. 나는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어. 그래서 한 가지를 길게 온 마음을 다해 하는 사람들 보면 참 부러워. 어떻게 보면 ‘헌신’이랄까. 너는 살면서 후회 같은 거 해본 적은 없어?
두 : 후회하면서 살기엔 생이 너무 짧다니깐. 몇 번을 말해. 단언컨대, 나는 너보다 하루를 더 음미하며 지내지. 저 누렁이도 엄청 음미해. 간식 위주지만. 그것도 행복한 거라고 봐. 더 무서운 이야기 해줄까? 나는 남겨진 날이 너만큼 많지 않아 보이지?
하지만 사실 누구나 먼저 떠날 수 있는 거야. 그런 거보면 하루살이가 제일 (제대로?) 오래  행복할 수 있어. 우린 하루살이나 매미를 동정할 처지가 못돼. 인간인 너는 더더욱. 사실 뭐, 내가 길에서 겪은 끔찍한 장면들 조차 너희는 매일 겪으며 살고 있잖아. 아,,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츄릅 좀


(자기가 내킬 때) 나를 힘껏 안아준다


두부는 그렇게 여지없이, 후회 없이 내일을 향했다.


켜켜히 지난 과거도 그 당시에는 살 떨리는 현재였다. 미래도 곧 현재가 된다. 그러므로 순간이나 제대로 살아보라던 두부의 말이 맞는 것이다. 진부한 클리셰처럼 시한부의 생을 선고받는 순간부터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장면이 생각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각자 나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아두고 생겨난 것이다. 공평하다.


책 <개를 잃다> 중

 

사노 요코의 그림책 <백만 번 산 고양이>에서는 흰 고양이가 나온다. 백만 번 다시 태어나고 무엇이든 되고 경험했던 고양이는 진정한 사랑(흰 고양이)을 만나고 엉엉 울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줄무늬 고양이가 다시 태어났던 이유는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작가 사노 요코도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녹색 재규어를 샀다고 한다. 무언가에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반복되는 오늘이 없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무엇을 하든 후회를 하진 않겠다. 약간의 반성은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게으른 나와 더 게으른 푸코와 아주 바쁜 제야와, 이 시간에 어딘가에서 혼자 슬픔을 달래다 지친 이름 모를 이웃들 모두, 고단하지만 행복하길 바라며 두부에게 츄르를..

 

<백만 번 산 고양이>



엄마에게 자가격리 잘하고 있냐고 전화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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