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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Dec 07. 2021

사람이든 개든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세상에 나쁜 개도 애도 없다.

될성부른 나무와 노란 싹수


강아지를 키우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유년기에, 즉 한 살이 되기 전에 개의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보통 개는 일 년만 지나도 성체라고 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짧은 일 년 사이에 개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이들과 함께 했는지는 개의 삶 전체를 좌지우지했다. 얼마나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얼마나 많은 허용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안정감을 느꼈는가에 따라 개의 일생이 달라진다.


우리 집 강아지는 그 중요한 시기를 흘려보낸 건지 놓쳐 버린 건지 다시 새로 쓰인 건지, 불투명한 시기를 지나 약 4~5살 즘 겨우 안정적인 생활을 가졌다. 덕분에 녀석은 다른 개들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 굉장히 서툴고 허접하다. 인간과 지내는 모습도 어릴 때부터 보통의 가정에서 자란 개보다는 훨씬 어색하다. 식습관도, 잠자리를 선택하는 모습도 하나같이 미디어에서 볼 수 있었던 굴곡 없이 자란 개들과는 사뭇 다르다. 처음엔 다소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의 '종의 특성' 같은 것일까 싶었으나, 가끔 산책하다 만나는 비슷한 모습의 귀가 뾰족한 아이들이 다른 개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꼭 종의 특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 푸코를 이제라도 다양한 환경에 노출시켜주고 싶어 반려견 운동장에 데려가 보기도 하고, 어찌어찌 산책 친구를 만들어줘보기도 했지만 괄목할 만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푸코의 몇 안되는 친구 스카


또래들이 어느덧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때론 부모가 되었다. 오고 가는 대화 속 키워드가 자연스레 육아와 가정으로 바뀌었다. 친구들의 뿌리였던 ‘구’ 가정, 그리고 그 씨들이 새로 뿌리내린 ‘신’ 가정. 표면에 보이는 것보다 가정의 형태는 다양했고, 그 안에서 구성원들의 역할도 천차만별이었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하고 ‘보통'의 가정이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어찌 그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는지 알 수 있었다. 모름지기 한 가정을 관통하는 집안의 분위기가 있는데, 유년기를 어떤 가정 풍토에서 보냈느냐에 따라 삶을 꾸리는 모습들도 각양각색이었다. 개, 고양이만큼이나 인간에게도 ‘유년기’는 거대한 근간 같은 것이었다.


나의 유년기는 어땠나. 모난 곳 없는 가정에서 자식을 키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부모님의 희생과 노력 덕에 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성인이 되기 전 당연히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 타인에 대한 귀 기울임, 그리고 효율을 따지지 않는 진실된 순간들이 뻥 뚫린 채 유년기를 통과했다. 결국 크고 작은 구멍으로 오류는 켜켜이 쌓였고, 성인이 된 지금도 삶의 굵직한 문제들이 다가올 때마다 나의 결함들은 거친 요철로 드러났다. 그때마다 안과 밖으로 상처를 주고, 혹은 아예 생소한 혼란스러움 들을 회피했다. 그래서 당연히 빚어지는 문제의 끝에는 건강한 자아성찰이 아닌 빈 자아로 똘똘 뭉친 자기혐오로 결론이 나곤 했다. 푸코가 낯선 개에게 엉덩이 냄새 대신 얼굴을 들이미는 것처럼 나는 다른 양상으로 삐그덕 삐그덕 성인으로써의 삶을 꾸리고 있다.


푸코의 몇 안되는 친구 밤이

가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한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던 문장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보며, 사람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며 상황을 다독이곤 했다. 그러나 녀석들을 만난 이후 그 말이 슬프게 들려온다. 누군가의 변화 가능성을 차단하고 그에 대한 희망을 체념했다는 강력하게 안타까운 말이다. 나도 나를 고쳐쓸 수 없을까.


고쳐쓸 수 없다는 말에 반박하듯 푸코는 어설프지만 사람과 개와 함께 지내는 걸 배우고 있다. 사회화를 위해 나름 적응하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유년기의 때를 벗겨내는 일은 새로 쓰이는 일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와 의지를 요구한다. 지우고 다시 써내야 하는 부분들. 그래서 여전히 푸코는 겁이 많고 먹이에 대한 집착하는 바람에 다른 개들에게 꼬장꼬장 거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먼저 같이 놀자고 엉덩이를 들고 꼬리를 신나게 흔들기도 한다. 녀석의 흐트러진 과거를 알기에 어설픈 시도들이 빚는 광경을 간혹 만나면 흐뭇함을 감출 수 없다. 

그렇게 바뀌어가는 푸코처럼 나 역시 나를 고쳐 쓰고 싶었던 작은 불꽃을 발견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에 가둬놨던 나의 가능성. 누군가와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나’가 될 가능성. ‘유기견은 원래 그렇지.’라는 범주화의 멍에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듯 녀석이 친구 맺기를 시도해보는 것처럼, 나도 허접하지만 마음으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때때로는 상대에게 선을 넘으려 한다. 어쩌면 ‘나도 나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지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런데,

금쪽같은 아이들과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육아, 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나온 영상 클립을 우연히 보았다. 두 분 다 한 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건 그 아이/개의 특성이에요. 모두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억지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 아이/개의 천성을 인정해주세요.’


아하! 그럴 수도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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