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강아지, 고양이를 마주하며
보통 거주지를 선택할 때 각자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누군가는 좋은 학군을, 누군가는 직장과의 접근성을 고려하며 안식처를 구한다. 나는 푸코와의 산책을 즐기기 위해 녹지의 유무를 우선순위를 두기에 지도 어플을 켜고 지도상에 초록색이 많은 곳들을 동그라미 치는 것으로 이사 준비를 시작한다. 덕분에 예전에 살던 곳에 비해 직장에서 멀어졌지만 강과 산이 가까워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성원들이 동물들에게 우호적이다. 동네 어귀의 길고양이들이 비교적 풍족하게 지내는 편이고, 푸코가 용변을 볼 수 있는 적절한 흙과 풀이 많다. 동네에서 살짝만 나와도 아파트 화단엔 이미 수많은 개들의 오줌으로 물든 ‘애견 배변 금지 팻말’이 적혀 있고, 고양이들이 잠시 쉬어갈 곳 하나 찾기가 어렵다. 이에 비하면 우리 동네는 세련되진 않았지만 푸코에게 인사해주시는 넉넉한 인심들이 있다. 길고양이들에게 말 걸어주는 누군가가 있으며, 고양이들의 끼니와 잠잘 곁을 내주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단층집 지붕을 천사소녀 네티처럼 뛰어다니는 녀석들이 보이고, 우리 집 지붕과 담벼락에도 종종 앉아있는 고양이가 있다. 물론 아직 제대로 인사해본 적은 없지만 한쪽 귀가 살짝 잘려있는 걸 보아 녀석도 누군가에게 관리받고 있는 고양이인 듯싶다.
특히 동네 골목에서 자주 만나는 고양이 세 마리가 있다. (아마 모녀관계가 아닐까.) '큰 삼색이', ‘흰검이’, ‘작은 삼색이’다. 비슷한 듯 다른 셋은 거의 늘 같이 머물러 있다. ‘큰 삼색이’가 엄마로 추정되는데 가장 머리통이 크고 포스가 다른 두 마리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 셋은 푸코와 자주 만나기에 경계는 하지만 도망가지는 않는다. 늘 온갖 호들갑을 떠는 것은 푸코 쪽이다. 미동 조차 않는 그들을 향해 놀자는 어설픈 신호를 보내면 셋은 철저하게 이를 무시한다. 세 마리가 머무는 음식점 한 켠엔 고양이 밥과 물, 집이 깨끗하게 챙겨져 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아침마다 그들을 챙겨주고, 땅값 비싼 서울 한 켠에 자리를 내주신 음식점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항상 그 앞을 지나간다.
매일 산책 길에 고양이들의 안부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산책 일과인데 그중 ‘작은 삼색이’에게 마음이 쓰인다. ‘작은 삼색이’는 나머지 둘에 비해 체구가 좀 작고 한쪽 눈이 없다. 한쪽 눈이 없는 고양이는 어렸을 때 허피스를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 처음엔 정면으로 고양이의 비어있는 한쪽 눈을 보는 것이 겁났다. 소위 '보통'의 고양이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인 건지, 어릴 때 읽었던 에드거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인 녀석의 비범한 외모를 보고 놀란 쪽은 나였다.
‘깜짝 놀란 기색을 내도 되려나, 불쾌하지는 않을까, 불쌍하다고 생각해도 되려나, 이 역시 불쾌하지는 않을까.’ 그 짧은 순간에 들이킨 숨을 멈추고 온갖 생각을 떠올린다. 녀석의 텅 빈 왼쪽 눈이 더욱 아찔하게 다가왔던 건 푸코 때문이다. 녹내장 치료 시술을 한 푸코도 언젠가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다는 막연한 예측.
푸코의 눈에 관을 삽입해서 안압을 조절하는 시술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구를 적출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돌아온 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정확한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녹내장은 치료방법도 없다. 시바견 특유의 유전병이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녀석의 견종을 분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컨디션에 따라 안압이 높아지지 않게 약으로 조절하고, 그 약에 내성이 생기면 또 다른 약을 찾아 악화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것이 이 몹쓸 병을 관리할 수 있는 최선이다. 반려인으로서 무언가 해줄 수 없다는 무력함과 녀석이 느낄 불편함에서 비롯된 울음이였다. 결국 모든 약에 내성이 생겨버린 왼쪽 눈은 운 좋게 적출하진 않았지만 시술을 하는 탓에 시력을 잃었다. 시술한 눈은 점차 쪼그라들었고 동공이 사라진 대신 눈물이 많아졌다. 두 눈으로 볼 때보다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나 인간의 걱정과는 달리 푸코는 금세 적응해서 여전히 산을 잘 뛰어다닌다. 무엇보다 한쪽 시력을 잃었다고 해서 녀석의 식탐은 전혀 쪼그라들지 않았다.
요즘 ‘작은 삼색이’와의 눈 마주침을 피하지 않고 뚜렷하게 보고 있다. 내가 녀석의 사정과 상황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이것저것 넘겨짚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처음 마주침 때보다 익숙해진 지금은 작은 삼색이의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주말이 되면 동네가 자연을 찾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등산객들 역시 나란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고양이 삼 모녀를 예뻐한다. 때때로 오가며 작은 삼색이의 눈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쪽 눈이 없어서 어떡하니.’ '아이고 불쌍해라.’ '아이코 징그러워라.’ 라며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이야기들을 건넨다. 남이사 뭐라 하든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오 년 동안 지켜본 ‘작은 삼색이’는 그 누구보다도 신나게 눈이 내린 밭을 뒹굴고, 자기 식구들과 식빵을 구우며 수다를 떨고 있다. 얼마전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없어.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뿐이네. …’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었다. 자신만을 투영한 상대에게 보고 던진 말들에 상대는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본인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되게 조심해하는 눈에 보이는 배려와 그 공기가 자신을 더욱 위축시킨다는 장애인 분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어느 산책길. 상대를 위한다며 던진 어설픈 위로들이 상대에겐 어쩌면 상처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며 오늘 어떤 이야기들을 던졌는지 다시 돌이켜보며 고양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푸코와 가던 길을 걸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 넘겨짚지 말 것. 정말 어렵지만 항상 신경 써야 할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