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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Jan 19. 2022

우리집 개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해피뉴이어

감사한 초대를 받아 혜림의 고향에 다녀왔다. 초대의 주된 목적은 '복실이 목욕하기'.


혜림의 부모님께서 한 살짜리 보더콜리를 키우고 계신데, 두 분이 13Kg가 넘는 복실이를 목욕시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푸코는 아주 큰 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시에 사는 개 치고는 나름 큰 개였기에 그 얇은 경험을 배짱삼아 강원도로 향했다.


눈이 살짝 덮힌 절경

복실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마당에서 행복하게 사는 강아지였다. 덕분에 실내에 사는 서울개보단 꼬질꼬질했으나, 단단한 근육과 자유롭고 행복한 표정을 갖고 있다. 도시사람이 시골출신 애인을 처음 만났을때 느낀 그 이질감과 묘하게 닮아있어 피식 웃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저 멀리서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개가 한 마리 보인다. 시크한 푸코를 보다가 녀석을 보니, 저렇게까지 주인을 반길 수 있구나 싶었다. '생명력' 으로 인사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보인다.


친구에게 보내는 사랑담긴 미소

복실이는 혜림에게 왜 이제야 왔냐는 반가움을 온몸으로 전한 후 나와도 가볍게 인사했다. 보통 경계심이 많은 강아지들은 손등으로 인사를 먼저 하고 서로의 냄새를 확인하는데, 녀석은 그저 모든 게 반갑고 신기해하는 게 보였다. 낯선이가 뻗은 손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채 가벼운 격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복실이는 자기 케이지에서 빨간 공을 들고 나왔다.


'던져!'


그렇게 복실이와의 공던지기 굴레지옥은 시작되었다. (굴레지옥이라고 썼으나 이런 걸 푸코랑 해본 적이 없어서 마냥 좋았다.) 보더콜리가 영민하고 똑똑하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인간과 간단한 의사소통이 되는 걸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공이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는만큼 복실이의 똑똑함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을 여러 번 주고받으니 지쳐가는 쪽은 인간이었다. 흰 눈이 쌓인 풍경이 무색하게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생명력으로 인사를 나눈 처음부터 꾸준히 복실의 생명력은 거의 괴물수준으로 커져만 갔고 나의 투구 자세는 형편없이 작아져만 갔다.

 

호기심 가득한 복실의 두 눈

 결국 지쳐버린 나는 잠시 녀석에게 간식을 주었고, 간식 마저도 놀라운 점프로 '환대' (?)  받았다.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 또래 어른들이 감당하기에 쉬운 에너지는 아니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녀석의 눈은 돌이켜보는 지금까지도 밝게 빛난다. 그 눈부심 사이로 흐려져만가는 푸코의 동공이 겹쳐흘러 잠시 탁해졌지만 복실이가 온 몸으로 알게해준 호기심과 순수함은 나를 이끈다. 아주 어릴적 처음 소꿉장난 하며 뛰어놀 던 그 곳으로. 그냥 존재 자체로 '생'이 느껴지던 그 순간들로.


 푸코와 두부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이 없어 늘 상상 속에서 다양한 스토리를 구성한다. 느와르로 출발했다가 서정적 전개로 몰입했다가 지나친가 싶으면 호러새드무비가 되는 엉뚱한 상상. 처음 마주했을 때의 둘은 노년을 향해가고 있어 그에 맞게 차분하고 늘어지는 모습이였으니 이러한 나의 상상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그래서 막연하지만 갓 태어난 어린 생명에 대한 환상과 기대감 같은 게 늘 있었음에도, 복실이를 통해 만나고 경험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언제 만났는지보다 만난 시점에 어떤 교감을 했는지 그것이 삶의 총체를 이룬다. 푸코와 두부의 과거부터 흘러오는 시간들이 각자 나선형으로 흐르고 나의 시간들이 가끔 교차하는 그 찰나의 시점. 내 첫사랑과 지금의 사랑 사이에서 무슨 차이가 있나 따져물어보면 이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새해가 되어 우리는 한 살을 더 먹었고 어느새 0X년도에 태어난 친구들이 성인이 되었다. 사회가 인정한 ‘어른’의 시기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 어설펐으며 가진 거라곤 치기 어린 패기뿐이었고, 세상과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들이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젊은 축에 속하지만 복실이처럼 세상의 모든 자극이 새롭고 짜릿하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중년과 노년의 감각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을꺼란 기대가 있다. 푸코와 두부의 젊은 시절은 생존 그 자체만 두고도 누구보다 치열했기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차분한 현재를 즐기고 사랑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이 안정감 속에서 그 치열함을 되뇌이며 달콤해할지도. 원치 않았던 경험과 자극들로 가득했던 그 시기를 가까스로 통과한 덕에 푸코와 두부는 온열 담요에 몸을 지지고, 주인의 겨드랑이를 더욱 힘껏 사랑하는 듯 싶다.


 나와 우리는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여유로운 이미지로만 기록될 뿐 실상은 다른 걸까.

푸코와 두부의 어릴 적마냥 생존만을 위해 빚어진 치열함이 녀석들을 쓰다듬고 있던 나의 오늘과 내일을 가득 채우고 있는건 아닌지. 아님 두 털뭉치들이 궁극적으로 나를 구해준 건지. 결국 어쩌다 만난 그 ‘생명력’ 이란 것이 지금 이 거실 가득 들어차있어 잠시나마 그 치열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건지.


덧.

푸코와 내가 함께한 5년은 인간에겐 고작 1/20 정도의 시간이지만 개에게는 생의 1/3 정도에 해당된다. 그래서인지 두 녀석은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얌전해졌다. 과거 사고뭉치 같던 녀석들이 지금은 누구보다 차분하고 얌전해지니 괜히 서운한 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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