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인듯 백수아닌 백수같은 무급휴직자의 인생역전을 향한 포효의 글쓰기
2017년부터 나의 직장史는 꼬일 대로 꼬였다.
더 완곡하거나 다른 은유적 표현이 불가하다. 말 그대로 꼬이고 엉망이었고, 그 상태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곧 과거 완료형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입사하면 스위스 본사에서 교육을 받은 후 업무 배치가 된다는 정말 달콤했던 외국계 아웃도어 회사의 입사 제안을 거절하면서까지 선택했던 곳은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제조사로 국가부도의 위기에서도 수출로 살아남아 망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 보이는 (겉으로는) 탄탄한 한국 회사였다. 그 때의 나는 짬밥에 걸맞지 않은 헛된 순수함으로 '평생직장'을 찾고 있었다.
짬밥값을 못한 대가는 참 처절했다.
안정을 찾아 간 입사 첫 출근길, 10년 넘게 큰 고장없이 타고 다닌 7호선이 제대로 고장이 났고, 나는 지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설명하며, '안녕하세요'보다 '죄송합니다' 삼세번을 먼저 말하고 시작한 그곳에서의 2.5년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투명 인간'이다.
나의 직속 상사는 K대 불문과 86학번으로, 우리나라 최고라고 꼽히며 경쟁구도인 재벌 기업 L과 S의 인하우스 광고 회사를 각각 10년씩 다니다 미국 MBA 를 마치고 국내 금융업계 1위 은행에서 마케팅팀 팀장을 하던 중 과거 S사 인하우스 광고 회사에서 맡았던 S사 계열의 임원이 대표로 옮겨간 회사의 러브콜을 받아 자리 잡은 분으로, 입사 첫날부터 퇴사 날까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시선을 주지 않았고, 인사를 받지 않았다.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늘 일어나는 '인사 반사'를 2년쯤 당하자 인사하고 싶지 않아져 출근하면 그냥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타고난 성정이 그래서인지, 결국 나는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다시 공기를 향한 인사를 했다. '어찌 되었든 난 인사를 했으니까'라는 참으로 비참한 자기위안이었다.
SKY 빼고 서울에 있는 대학 나왔다고 말하면 안 된다거나, 어학연수나 유학 경험이 없는 나를 따로 불러 '어디서 영어 배웠냐?'라고 했다. '어떻게 영어공부했느냐?'가 아니라 '어디서'였다. 덧붙여 '영국이야, 미국이야?'를 추가 질문했다. 대학 4년도 그리 녹록지 않게 졸업했기에, 사회에 나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부터 전화 영어와 새벽반 영어학원을 다녔고 월간 영어방송 교재를 독학하며 영어공부를 했다는 대답에 '그럼 중학교 수준 밖에 안되는 영어'라며 앞으로 영어 쓰는 업무는 빠지라고 했었다. 내 안의 무언가 하나가 지하로 떨어지는 소리가 페이드아웃으로 들렸다.
업무 능력이 별로여서일까, 무엇 때문일까를 수없이 고민하며 참 피땀 나게 일했다. 잘 보이고 싶었고, 인정까지는 아니어도 무시는 받고 싶지 않았다. 상사는 내게 인사평가 D를 주었지만, 종합평가는 B가 나왔다. 인사평가가 공지된 날, 그는 나를 불러 '자만하지 마'라고 했다. 그의 눈에서는 '너 까짓 게'라는 소리 없는 비아냥이 쏘아지고 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말처럼, 노가다는 내가 하고 성과는 모두 그 상사가 직접 채용한 남자 직원 K에게 돌아갔다. 전시회를 앞두고 수십 개의 제품 샘플을 일일이 닦아 박스에 담아 준비하는 나를 두고 K는 급한 약속이 있어 오늘은 먼저 가니 전시회 마칠 때 더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고, 두어 시간 후 샘플 정리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전철역 인근의 맥줏집 밖에서 다른 팀의 남자 직원과 담배를 피우며 낄낄대는 K를 보았다. 나는 모른척했다.
근무하는 내내 내게는 말을 시키지 않았고, 중요한 회의에 부르지 않았다. 회식을 해도 혼자 알아서 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식사 시간에는 상사, 나, K - 3명이 주로 함께 했는데 늘 나를 제외한 대화가 이어졌다. 미국 MBA를 마친 상사는 미국에서 오래 유학한 K를 무척 좋아했고, 점심시간이면 둘만이 통하는 미국 이야기가 주요 얘기 소재였다.
그저 없는 사람처럼, 오늘은 큰소리 듣지 않기 위해 숨죽여 지낸다는 서글픔을 참 오랜만에 다각도로 경험했던 시간이었고,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울분이 석회화되어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때쯤 손짓을 보낸 새로운 회사에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향했다.
하지만 그렇게 옮겨간 회사에서 만난 상사는 나를 심리학에 빠지게 했다.
친절과 악랄함을 동시 또는 교차 시전하거나, 새벽이든 주말이든 명절이든 아무 때나 카카오톡, 전화, 메일 등으로 연락해서 본인은 현재도 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는 그러고 있느냐는 '나만 일해 억울해' 식의 폭력적 커뮤니케이션,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팀원 하나를 구제불능을 넘어 정신병적 기질이 있는 것 같다는 모함을 공개적으로 하거나, 십수년간의 경력은 물론 함께 일했던 모든 협력사와 상사들로부터 찬사만을 받아왔던 뛰어난 인재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자기자랑을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자주 했지만 매우 기본적인 업무 프로토콜에 대한 이해가 아예 백지인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업무 태도 등을 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많은 책을 읽고 자료를 보았다. 알고 싶었다. 내가 비정상인지, 그녀가 비정상인지.
그렇게 자료를 살피던 중 그녀와 너무나도 일치하는 성향, 성정, 행동 양상의 인간 유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소시오패스였다.
그녀와의 1년 반 후, 나는 수면제와 위장약을 상비약으로 두고 매일 복용하게 되었다. 스트레스로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계속 갱신하며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나를 골수까지 이용해먹으려는 그녀에게 '지식 은폐'로 앙갚음했다. 알면서 알려주지 않았고, 맞닥뜨린 문제에 조언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이직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것이 나를 죽이는 독극물인지, 아니면 새로운 기회로 흘려보내 줄 생명수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밤마다 이어지는 그녀의 신세한탄 카톡과 울부짖는 전화가 내 안의 무언가를 갈퀴로 매일 긁어대어 이미 과다출혈이었다.
결론적으로 2017년부터 이어진 꼬인 직장史는 우울증으로 인한 병가, 무급휴직으로 막이 내려가는 중이다.
'이 사람은 아닌 것 같다'를 판단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따로 있지 않았다. 새로 간 곳의 상사는 이제 막 합류한 내게 팀원 하나가 선동하는 스타일이며 성과가 없어 문제라는 얘길 넌지시 했고, 더 윗선의 추천으로 신규 입사한 사람의 연봉을 완곡하게 알려주며 본인은 저 사람 채용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이전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겨 옮겨온 사람이라는 과잉 정보를 팀 내 소수만 있는 카톡 방에 투척했다. 극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비도덕적으로 당사자 모르게 공유함으로써 형성하는 유대감이 얼마나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이미 긴 밥벌이 살이에서 깨달았기에, 이런 사람은 '정말 아닌 것이다'를 알던 나는 무책임한 청자를 자처하며 긍정, 부정도 아닌 '아 그렇군요'만 연발했다.
입사 한 달 후 얼굴을 칼로 찢는 듯한 통증의 안면신경통을 경험했고 두 달째 대상포진에 걸렸다. 그리고 세 달째, 우울증 약 복용을 시작했다. 바닥을 친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몸과 마음 모두로 처절하게 경험한 한 달간의 우울증 증세 발현은 숨 막힘 그것이었다. 바닥을 치다 못해 해저 이만 리 땅굴을 파듯 웅크리는 내가 싫었고, 빠릿빠릿 깔끔한 일처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 하던 나의 헤맴에 대한 자괴감은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도저히 의지로 회복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자 '정말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상사니까, 팀장이니까, 현재 맞닥뜨린 일신상의 문제를 밝히고 양해를 구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셀 수 없이 하며.
결론적으로 나는 그녀의 '팀원 매니지먼트'의 일환으로 현재 병가, 무급 휴직 상태이다. 직장 생활 내내 나의 꿈은 일요일 밤에도 커피를 먹는 것이라 말해왔는데, 그게 실현이 되었다. 이제 나는 일요일 밤에도 커피를 먹고 평일 새벽의 신선한 공기 냄새를 맡으며 잠자리에 들며 별 헤는 밤을 만끽한다. 하지만 앞으로 뭐 해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급습하면 다시금 뒤척이며 약봉지와 맥주캔을 찾아들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십수 년간의 직장 생활은 치사하고 억울한 일의 일상화였고,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순응하는 내게 실망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직장 생활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은 신입 첫 입사지원의 자기소개서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 세계는 그저 처절한 밥벌이 싸움, 먹고살기 위한 비열함이 곧 경쟁력이자 역량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몇가지 잔재주 뿐인데, 그 중 스스로 으뜸으로 꼽아볼 것은 글쓰기이다.
넉넉치 않은 어린시절, 글쓰기는 나를 흑백의 일상에서 컬러의 미지 속으로 날려보내 주는 유일한 수단이자 통로였고, 뛰어난 우등생까지는 못되었던 학창시절의 나를 평범의 영역에서 '글 좀 쓰는 아이'의 비범한 세계로 밀어올려주었다.
먹고 살기 위해 저만치 밀어내었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던 글쓰기의 삶, 글로 밥벌이 하는 인생에 대한 작은 불씨가 깜빡이며 번아웃해버린 내면의 연못에서 부력처럼 떠오른다. 지금의 이 떠오름이 머지 않은 미래에는 피어남으로 승화되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오늘부터 인생을 바꾸기 위한 50개의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가난했던 20대를 거쳐 누구보다 짠맛나는 치열의 30대를 보냈고, 이 30대가 끝나기 전 오랫동안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내뱉지도 못했던 그것.
'꿈'을 실현해보려고 한다.
그 꿈을 위해 나는 30년을 준비했음에도 긴 시간 망각했다. 이제야 환기가 된 그것.
돌고 돌아 미지근해진 내 심장에 온도를 불어넣는 그것.
그것은 나의 이름이 찍힌 책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에게 읽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