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마케터가 되었나

내 안의 욕망을 실현하는 합법적 경로의 선택 – 나는 마케터가 되었다.

by 도정하

- 10년째 나의 하루를 깨우는 맥심모카골드와 내 돈주고 사는 유일한 사무용품인 스테들러펜-


‘왜 나는 마케터가 되었나’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를 세번쯤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의 많은 책에서 느꼈던 것처럼, 문장과 단어들이 흘러가듯 이어져 또박또박 하게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책의 제목에 대한 답만큼은 분명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그것은

‘딱히 없다.’

마케팅은 취준생들에게 상당히 인기있는 직무라고 한다. 영업, 재무, 인사, 구매 등 회사 내 대부분의 직무명들이 한자로 된 가운데, 디자인과 더불어 몇 안되는 영어 직무명이 주는 막연한 있어보임과 각종 드라마에서 실제 고증 없이 재현된 메이드 바이 작가님의 마케터 캐릭터 (세련된 패션센스와 트렌드에 민감한 감각적 취향을 겸비한 넉넉한 집안의 명문대 졸업한 강남3구 또는 종로구 평창동이나 해외 출신들)가 양산한 안타까운 기대심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10년간 명함에 마케팅이라는 큰 지붕 아래서 소셜미디어, 바이럴, 홍보, 디지털 마케팅 등등의 직무들을 거치며 온 몸으로 거치며 얻은 결론은,

‘마케팅을 제외한 각 부서들이 하는 업무들을 빼고, 회사가 돈 벌 수 있도록 보탬되는 모든 일’이 바로 마케팅이 아닌가 싶다.

돈을 벌려면 제품을 팔아야하는데, 제품을 팔려면 알려야하고, 알리려면 소비자한테 뭔가를 보여줘야하고, 보여주려면 뭔가 이야기를 만들던 사진을 찍던, 그림을 그리던 해야하고, 이걸 하려면 일단 예산부터 따와야하고.

'자 이번 신제품의 성공적 런칭과 매출 신장을 위해 이것을 해야하는데.. 흠.. 이거 어디서 해야하지?'

라고 회의 때 얘기나왔는데 바로 ‘이것을’에 대해 누가, 어느 팀이 주도적으로 책임지고 할지에 대해 바로 답 안나오면, 영락없다!

마케팅팀 당첨!!!! 추카추카! 마케팅이 할 일입니다~!!

올해 복고풍이 유행이라니 짚신을 팔아보자고 하면, 짚신 현재 시장 상황과 잠재 고객을 파악한 후 어떤 소재의 지푸라기로 생산하여야하는지, 그리고 제품이 만들어진 후에는 짚신의 인사이트를 뽑아내어 어떤 컨텐트를 제작, 배포하여 확산함으로써 매출을 당길 수 있는지에 대한 모든 고민과 노력의 총결산이 곧 마케팅이라 생각된다.

(ex; 내 발이 숨을 쉰다, 이제는 짚신 시대! 등의 바이럴 영상이라던가, '요새 핫한 완소템. 3주간 직접 신고 출퇴근한 썰' 등의 리뷰 컨텐트 등)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 업무는 거참 별걸 다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짜친’ 것이 많다.

돈이나 쓰는 팀, 뭐하는지 모르겠는 팀, 겉만 번지르르하게 이빨이나 까는 팀 소리를 듣는 경우가 태반인게 마케팅팀의 숙명이기에 ‘이것이 피피티다!!’의 정석을 보여주듯 업무 보고서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하는게 마케팅팀의 부서원 주업무기도 하다.

가끔 사은품 포장하고, 제품 전시하는 장식장을 걸레질 할 때 ‘나는 왜 마케터가 되었나?’를 곱씹어본다.

왜 나는 마케터가 되었을까?

일단 마케터가 되면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고,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쾌감을 맛보리라 생각했다. 즉 머리 속 상상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삶을 살게되리라는 망상!!

그것은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요, 마늘과 쑥먹고 곰이 사람된 단군왕검의 신화에서나 가능할까? 실제의 마케터는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여,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뽑아내는 것을 한다.

마케터의 최고 중요한 고객은 돈내고 제품을 사는 소비자가 아니라 내부에서 결재란에 싸인해주는 분들인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분들을 대부분 임원이라 부른다.

일반 소비자가 보기에는 시대가 멈춘 듯, 80년대에 촬영하여 이제 보여주나 싶은 광고들도 최종 컨펌하는 그 분들의 눈에서는 '이런 시대의 명작이! 과연 CF는 30초 예술이 맞구먼!' 이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수많은 마케터 (광고인 포함)는 그 분들의 입맛에 맞춰야만 컨펌받고, 실행하고, 결과보고서를 써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게 현실이고 사실이다.

진짜 현실적인 의미의 크리에이티브란, 대행사의 마케터라면 고객사가 '그래서 얼마를 쓰면 얼마를 회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 (비록 진짜 이루지 못할지라도 감언이설이라도, 보고해서 욕먹지 않을 답변을 들려달라는 고객사의 소리없는 아우성에 대한 적절한 응대)이며, 인하우스 마케터라면 예산 넘지 않고, 임원의 신경 긁지 않으면서 뭔가 많이 한듯한 느낌을 주는 계획이라는 것이 더 현실적 정의가 아닐까. (1000원만 주시면 나물 3종과 굴비, 갈비가 포함된 8첩반상 차려내겠다는 당찬 포부의 그런 느낌적인 느낌!)

이렇게 기대와 현실에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정도 걸리는 괴리가 있음에도 왜 나는 마케터가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수많은 마케터들이 주어진 제약 속에서도 마음 속 저 끄트머리에서 끓어오르는 '이거 재밌지 않냐? 이거 재밌겠다!'를 연발하는 병맛 아이디어를 폭발시키고 싶은 욕망을 갖고 일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비록, 결국, 당연히 안되겠지만 그래도 이거 하면 재밌을텐데.. 괜찮을텐데.. 라는 되도 않는 상상을 업무로 해보고 싶은 무모한 열정이 있어야만 그래도 살아남고,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직무가 마케팅이기 때문에 나는 마케터가 되었다.

톡톡튀는 아이디어는 공모전이나 학교의 팀플에서나 가능하다. 톡톡튀는 아이디어를 환영하는 회사는 정말 많지 않다. 그저 무난하게 회사가 바라는 것을 잘 정제해서 실현해내고, 결국 짜인 틀대로 나의 아이디어를 뎅강뎅강 재단해야 하더라도 그 팔다리 잘린 아이디어 속 저만치에는 털갈이가 안된 몬스터의 모습을 한 나의 날 것 욕망 아이디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던 그 때의 열정을 몰래 몰래 업무에 숨겨놓을 수 있는 것, 그 숨김 처리에서 오는 짜릿함.


그 것 때문에 나는 마케터가 되었고,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그 작은 인생의 소망을 위해, 나는 오늘도 제품 장식장을 걸레질하고 창고 청소와 샘플 정리를 하며 번민과 고민 속 질문을 한다.


'나는 왜 마케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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