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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03. 2023

억대 연봉 찍고 8개월 후, 다시 마케터가 되었다

episode 8. 퇴물, 쇼미 더 머니

이런 브랜드를 시작할 건데,
어떻게 마케팅하면 좋을까?

서래마을에서 만난, 그 만남이 두 번째인 마케터계의 어른이 물었고 제한적이긴 했지만 주어진 정보를 보고 나름의 의견을 말했다. 그리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회사는 왜 나왔는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가 오갔고, 뒤이어 선약이 있어 일어선다는 그분은 총총 떠났다. 나는 카페에 남았다.


처음 와본 서래마을이었다.


고즈넉했다. 햇살이 창문이 좁다는 듯 서로 밀치며 쏟아지고 있었다.


컵받침이 있는 도자기 잔에 담긴 커피를 정말 오랜만에 마셔보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그냥 누워나 있지 몸을 움직이는가 하는 작은 번민들이 쉴 새 없이 피어올랐지만 차가운 공기가 뺨에 머무는 것 자체가 가히 나쁘지 않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몰라 일단 따뜻하게 입고 나왔는데 가볍게 허리를 묶은 트렌치 차림의 사람들 속에서 털코트를 입은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남의 많은 지역들 중에서 그곳의 사람들의 걸음이 가장 여유 있게 느껴졌다. 걷는 것인지 뛰는 것인지 모를 걸음으로 지난 10년 이상을 살았던 나만 그 속에서 경보하고 있었다.


낮과 밤이 몇 번 바뀐 후, 서래마을의 그분에게 연락이 왔다.

가능하면 회사에 잠깐 와서 얘기 나눌 수 있느냐는.


숨 막히는 책상이 있는 사무실이 아닌 널찍한 회의실에서의 만남이었고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업체 커뮤니케이션과 행정처리를 할 단기 재택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있냐는 제안을 받았다.


재택, 더 나은 급여.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즉시 리플릿과 웹사이트 제작에 투입됐다.


아르바이트지만 업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직함도 주어졌다.


진정한 스타트업의 상황. 브랜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장의 사업자등록증뿐.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이 아무것도 하기 힘들 것 같은 나를 불러냈다.


십수 년간의 구력과 바닥부터 구른 짬밥은 우울증이라는 벼락을 맞았고 나는 ‘구 마케터 현 최저임금 노동자‘, 즉 퇴물이었다.


스윙스는 퇴물 소리에  포효의 랩으로 존재를 증명을 해 보였지만 나는 그저 밥값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어버린 스케줄 달력을 찾아 꺼내고 연필을 깎았다. 펜 몇 자루와 수정테이프, 계산기도 책상에 세팅 완료다.


주어진 일거리는 내게 쇼미 더 머니의 오디션 무대였다. 꾸물댈 틈 없이 무대에 올랐고 비트 주세요를 소심하게 외쳤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설렘이 있었다.


회사를 나와 맞이한 두 번째 계절.


다시 마케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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