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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02. 2023

억대 연봉 찍고 7개월 후,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episode 7. 잊힐 권리

작은 돈벌이었지만 매일 출근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재택업무라 하루 종일 누워있다 시계보고 몸을 일으켜 머리 한번 빗고 자리에 앉으면 그게 출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물은 조금씩 덜 쏟아졌다.


약을 복용한 후로 우울감만 사그라든 게 아니라 그 외 살며 수반되는 여러 감정들이 같이 사라졌다.


생각을 비운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영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때 생각 비우기는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 불가항력의 그것임을 알게 되었다.


급히 이사 가며 짐을 싹 빼간 집.

그게 나의 머리 속이었다.


급히 떠나느라 제대로 치우지 못해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일단 큰 것들은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멍한 그 속에서도 때때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를 복기하게 되어 또다시 괴로워져 몸을 뒤척였고 약을 먹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누구도 찾지 않는 나날들 속에서 문득 한 때 종종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며, 회사 험담과 사는 얘기들을 나누던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무엇이든 생각하면 바로 실행하는 그 습성만은 여러 신변의 변화에도 그대로여서 자리 잡고 앉아 지인들 중에서도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소수 정예로 연락을 해 보았다.


일부는 연락이 안 왔고, 일부는 잘 지내냐는 인사에 근황 들었다며 잘 지내라고 서둘러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또 얼마의 사람들은 간단히 근황을 나누다 몸이 아파 쉬며 학습지 화상 수업 강사를 한다는 얘기에

어머. 진짜? 그렇구나.

로 반응을 보이거나 답이 없기도 했다.


잊힐 권리를 만끽했어야 했는데, 어리석었다.


하나씩 전화번호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씩 지워내려가던 중, 다니던 회사에 한번 오셔서 마케터로 살아온 얘기를 해 주신 업계의 어르신, 성함이 보였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과 기업 출신, 세계 최고의 MBA 졸업, 대기업 임원을 거쳐 현재는 마케팅 아카데미를 하신다고 들었다.


마케터라는 내 직업과 역할, 권한에 대하여 큰 회의와 비참함을 느끼게 했던 지난 상사가 본인의 역량 부족을 쇄신할 목적으로 회사에 초빙했던 분이었다.


그런 상사가 만든 저녁 자리의 비범한 인물.


상사가 제대로 하지 못해 엉망 된 일처리 하느라 야근하던 중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의전하듯 식사해야 하는 자리라니, 반갑지도 않고 밥 먹느라 더 늦어질 출근에 짜증이 밀려왔다.


기계적이며 영업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밥을 떠먹고 적당히 추임새를 넣고 있었는데 감히 내가 쳐다볼 수도 없던 위치에 있다 오신 분답지 않게 목소리가 다정했다.


어떻게 직장생활을 했고 어떤 계기로 마케터가 되어 현재의 위치까지를 왔는지를 잔잔하게 대화하듯 풀어주는 그 이야기가 어느새 집중하게 되어 볼이 미어지게 밥 떠먹기를 잠깐 멈추고 집중했다. 참 복이 많은 양반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화려했다.


심지어 그분이 그날 차고 온 마스크 걸이조차도 금이었다.


빛났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때 일이 정말 재미있어서 휴가 없이 한 해를 보내기도 했고, 10년 후 나처럼 되고 싶다는 팀원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받으며 바닥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숨을 몰아 쉬는, 하찮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저렇게 인생의 성공 계단을 정해진 코스처럼 밟아 올라가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고꾸라졌을까 생각하며 억지로 막아두었던 눈물의 둑이 무너졌고 우울감이 터져 나왔다.


이 사람은 인생의 고난이 전혀 없었을까?

늘 성공만 있었을까?


압도적 부러움에서 궁금함이 부표처럼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번호 지우기를 멈추고 연락이 오든 안 오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인사 메시지를 적었다.


딱 한번 본 사이었기 때문에 연락이 안 와도 민망하지 않았고, 다시 번호 지우기에 몰입하는 중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무엇하고 있냐는 물음과 함께 시간 되면 서래마을의 카페에서 차 한잔 하자는, 순식간에 약속이 잡혔다.


회사를 나온 후 차 한잔 하자는 사람이 처음이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전화번호만을 남겼다.

텅 빈 것은 이제 머리만이 아니었다.


며칠 후 서래마을을 향했다.


바람이 서늘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와 두 번째 계절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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