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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04. 2023

억대 연봉 찍고 9개월 후, 최저임금 일자리를 그만두다

 episode 9.  어쩌다보니

계약직, 파견직도 아닌 위촉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퇴사 후 첫 돈벌이 ‘화상 수업 강사’.


직업이라기에는 사명감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라기에는 책임이 많았으며 경험 삼아한다기에는 절실했다.


매일 5시간가량 쉬는 시간 없이 10분마다 아이들을 바꿔가며 하는 수업에 대한 짙은 회의감, 그 10분의 수업에 대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학부모님들의 기대, 때때로 금쪽이에 나올법한 아이들의 행동과 언행을 보며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었다.


어린이의 결석으로 수업을 못하면 당연히 그 시간만큼이 급여에서 제외되지만, 10분의 휴식 시간이 생겼고, 그 시간은 매우 소중했다.


10분이면 밥 먹고 이 닦고 차까지 한잔 마련해서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회사에 지박령처럼 있던 시절, 정신 차려보면 밤 11시가 되던 시기의 시간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내게 존재하는 시간은 단 두 개.


출근과 퇴근뿐이었다.


10분의 위대함과 함께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일주일에 단 한번 만나고,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기에 친밀한 대화를 나누며 영어를 가르쳐줄 수 없는 그런 제한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격하게 반겨주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 어린이 좋아하네..?


지리멸멸한 어른의 세계에서 곰탕처럼 고아져 온 지난 시간들이 완전히 녹여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순수가 이 아이들로 인해 깨어내고 감동받고 때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함으로써 받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 약을 먹고 술을 먹는 악순환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단기이기는 하지만, 더 나은 급여의 일이 찾아왔고 이런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받는 돈이라기에는 너무 적었다.


이틀쯤 생각하고 퇴사 의사를 밝혔다. 위촉직은 개인사업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는 고용노동부의 민원 답변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정리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려 했으나 담당하는 100명이 넘는 담당 어린이들의 학부모님들께 전화 상담하여 본인의 퇴사와 교사변경을 알려야 하며 계약이 있기 때문에 당장 그만둘 수 없고 특정일까지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직 전 퇴사 통보, 노티스 시점은 암묵적으로 4주가 기본이었는데, 때로 그것이 지켜지지 않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법적인 보호를 제대로 받는 정규직일 때의 이야기였다.


4대 보험, 퇴직금, 연차 모두 없는 최저임금 이하의 위촉직이었음에도 일하는 과정 중에서도 정규직과 별반 차이 없는 강도와 의무를 부여하더니 퇴사에서까지도 노티스를 지켜야 했다.


권한과 권리는 없으나 책임과 희생만 있는 자리가 바로 '위촉직'이었다.


아이들이 좋았기에 남았던 아쉬움이 단번에 삭제되었다.


바로 굿바이 상담을 시작했다. 물론 이 업무의 시간은 급여에 반영되지 않았다.


수업을 진행한 짧은 기간에도 정이 들었던 아이들은 내가 그만둔다는 소식에 엉엉 울기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싶어 하여 어머니께서 상담 중 바꿔주시기도 하였다.


이 아이들의 기억에 내가 어떻게 남을지 궁금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선생님으로 다가간다는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두렵게도 느껴졌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정당하고 여유 있는 대우가 반드시 따라야 함을 알게 됐다.


푼돈을 쥐어 주며 착취하듯 더 많은 아이들을 받으라고 밀어 넣는 식이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짧든 길든, 어린이에게 수업과 선생님이란, 인생에 대한 문제였다.


개선할 수 있는 그 어떤 권한도 없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최저임금 이하의 일자리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다독여 주며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야.'라고 작별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굿바이 상담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수업 날.


학부모 메시지로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 함께 본인의 연락처를 남긴 분들이 계셨다. 정말 꼭 부탁한다는 말이 한번 더 적혀 있었다.


모른척하기 어려웠고, 업무를 마무리 짓고 그 회사와의 인연이 모두 정리되었다고 생각되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메시지를 남겼다.


연락을 기다렸다며 반가워하셨고, 10분의 수업이지만 그간 만났던 수많은 학습지 선생님들, 화상 수업 선생님들과는 많이 달랐어서 꼭 연락을 하고 싶었다며 원래 무엇하던 분이냐고 묻는, 일이나 상담이 아닌 그냥의 대화가 이어졌다.


돈도 안 되는 일이라며 수업을 마무리할 때마다 스트레스로 냉장고 앞에 달려가 맥주부터 마셨는데, 그러면 안 되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원래는 마케터, 영어는 서른이 넘어 시작했고 테스트 차원에서 취득한 테솔을 발판으로 외국계 근무를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쉬던 중 화상 수업 강사를 하게 되었으며 여러 근무 조건은 좋지 않았지만 어머님 같은 분들, 그리고 어린이들 덕에 추억도 쌓았다는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란다는 말을 더하려던 찰나, 불쑥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이제 뭐 하실 거예요?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 답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의 적막에도 나의 답을 기다리는 전화 너머의 젊은 어머니가 눈에 보였다.

최근에 제가 다시 마케팅 일을 하게 됐어요.
정규직은 아니지만, 일단 잘 론칭까지 마무리하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영어 원서 읽기
클래스를 해볼까 해요.

수년 전, 미국 출장을 함께 갔던 동료가 언젠가 공부방을 낸다면 영어 원서 읽기 클래스를 해보고 싶다던 말이 왜 그때 지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롱면허가 되어 저 어딘가에 꽂혀있는 나의 테솔 자격증을 활용해 뭔가 해보긴 해야겠다는 아주 미약한 생각이 뇌도 아닌 저 멀리, 무릎 정도의 위치에서부터 일어서는 수준이었는데 불쑥 튀어나왔다.


아 그래요? 언제 오픈하시죠? 우리 아이 보냈으면 하는데요.


마케터 생활에서 피티 중 돌발 질문과 상황에는 인이 박힌 터라 놀라지도 않고 '일단은 화상 수업으로 해보려고 합니다.'라는 말이 뻔뻔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왔고, 순간 말이라는 것이 때로 뇌에서의 담금질을 거치지 않고 내면 어딘가에 박혀있다가 갑자기 쾌속으로 날아올 수도 있음에 놀랐다.


나비 머리띠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던 나의 첫 번째 제자.


그렇게 나는 영어 튜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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