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사람은 특별한 결심이나 거창한 다짐 따위 없이, 돌이킬 수도 후회하지도 않는 결정을 한다. 나에겐 타투가 그랬다.
스물 하나쯤 타투에 관심이 생겼다. 내 선택으로 나의 외모 중 한 부분쯤은 바꾸고 싶었다.
기왕이면 그 변화로 날 드러내고자 했다. 삶의 목적을 담은 메시지이자 상징(emblem)이길 바랬다.
피어싱도 성형수술도 적합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타투는 어때?" 등에 나무를 심은 대학교 친구가 물었다.
보수적인 한국, 엄격한 부모님, 어른이 되어버린 채 만난 몇 해를 곱씹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생각했다. 그 사이 친구의 타투는 하나둘씩 늘었다.
무얼 새길지는 몰랐다. 새기기 위해 새길걸 찾고 싶진 않았다.
레터링일지 도안일지조차 결정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목적 없이도 살 수 있던 시기였다.
때가 되면 나오겠거니 생각했다. 시간을 냇물에 띄워 흘리되 일상의 주변을 늘 훑었다.
취직하기 직전 한 소설을 만났다. 영화까지 나온 대중 판타지였다.
소설 속 세상에서 사람들은 주인공을 상징(emblem)으로 삼길 원했다. 휩쓸리고 떠밀린 주인공은 결국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쓰였다.
그의 삶은 온통 우연이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사람들은 대의를 중심에 둔 해석을 붙였다.
모두가 각자의 의미를 담아,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그런 타성적인 삶도 어쨌거나 밖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정의로웠을 테지만.
사실 그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고 괴로워하고 정신이 피폐해지면도 주인공은 물러서질 않았다. 자신의 선택을 최우선에 두며 언제나 뚜벅뚜벅 천천히 걸었다.
전진을 위한 그 작은 선택들을 대의도, 절대악도, 편견도, 신념도, 집착도 무너뜨리질 못했다.
소녀는 마지막에 혼자 남는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영웅도 악인도 아닌 채.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만 쥐고 그저 앞을 바라보는 소녀를 비추며 이야기는 끝난다.
비틀거리는 소녀의 전진에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소설을 세 번쯤 읽었을 때 별 생각도 없이 친구에게 타투이스트를 소개받고 바로 연락을 했다.
소녀의 상징, 등 뒤에 화살을 문 새는 이렇게 품에 들어왔다.
목덜미를 따라가는 등 윗부분에 새를 넣었다. 시선이 닿지 않으니 의식해야만 보이는 사각지대다.
죽지 않는 새는 나를 감시하는 최후의 보루가 됐다.
너의 출발을 잊지 마. 너의 선택을 현실과 타협하며 내려놓지 마.
너의 이성과 판단의 자유를 지켜. 비틀거리는 건 상관없어, 다만 너의 인생을 타인의 손에 맡겨버리지는 마.
타투란 건 본질적으로 상징(emblem)이라 그 의미를 타인에게 설명하기가 무척이나 부끄럽고 무안하다.
등 뒤에 사는 새를 본 친구들은 열에 아홉이 의미를 묻는다. 나는 보통 말을 흐린다.
누구에게도 이 초라한 선택의 순간과 별 것 아닌 결정을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나를 잃어간다 생각하는 요즘, 스스로를 향해 비틀거리는 삶을 긍정하라고 채근을 하고 싶어졌기에.
날을 세워 기억을 다듬고 거칠게나마 의미를 정리해본다.
허리를 꼿꼿이 펴진 못하는 평범한 하루하루다. 흔히 사회생활이라는 껍데기를 나는 잘도 쓰고 다닌다.
남다른 그릇으로 세상을 품을 수도, 야망을 드러내며 저돌적으로 달려 나갈 수도 없다. 그 정도의 능력따윈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잘 안다.
그저 부러지지 않고 버틸 힘만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떤 불공정의 순간, 모두가 시류에 흘러간 비정상의 시기에, 옳다는 가치가 기어코 옳다 판단했다면, 마지막 순간에 눈치를 보고 자유를 포기하기보단, 목소리를 내고 상처를 입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어나가는 꼭 그 정도의 용기를 나의 새가 지켜주길 나는 늘 바라고 있다.
Are you, are you
Coming to the tree
strung up a man
They say who murdered three.
Strange things
did happen here
No stranger would it be
If we met at midnight.
In the hanging 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