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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Apr 02. 2022

그녀의 세상이 이제는 낙원이길

도마-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외할머니가 잠시 요양원에서 돌아왔다.


하루에 60만명씩 확진자가 쏟아지는 나날 속 할머니가 머무는 요양원에도 코로나19 확산세가 겉잡을 수 없어졌단다. 할머니의 방이 있는 3층 병동은 사실상 작은 코로나 치료센터가 됐고, 한 명의 요양보호사가 층 전체 어르신을 돌봐야 하는 상황까지 펼쳐졌다.

컨트롤 불가 수준을 넘어서자 시설은 PCR 음성이 나온 어르신들을 잠시 집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3차 백신까지 맞은데다, 젊은 날 주1회 등산과 주3회 수영을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외할머니는 제1순위 호명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나온 나의 할머니는 당신이 거주하던 집 대신 엄마와 아빠가 사는 집으로 잠시 몸을 옮겼다. 당신이 거주하던 집은 할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신 후 나의 독립을 위한 임시 거처가 된 탓이다. 장바구니 하나에 들어가는 단출한 짐이 전부였고 엄마는 그걸 들고 "엄마, 이리 와"를 연신 외쳤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집(임시 거처) 거실에 남은 더블 사이즈 돌침대를 떠올렸다. 할머니의 짐을 정리할 때 엄마는 아깝다며 차마 돌침대를 버리지 못했다.

"사람을 불러서 언젠가 가져갈테니 잠시만 같이 살아봐"라는 말을 엄마에게 들은지 8개월째. 화이트 앤 우드로 맞춘 내 첫 독립 공간의 마루 절반을 떡하니 차지하는 돌침대의 인테리어적 존재감은 가히 어마무시해서 집들이를 온 모든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결국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중국 직구 사이트를 뒤져 5인용짜리 거대한 그레이 쇼파 커버를 구매했고, 안 쓰는 이불 세 겹을 돌침대 위에 깐 뒤 그 위에 쇼파 커퍼를 덮어씌우고서야 20대 자취방과 (쇼파가 된) 돌침대의 공존을 심적으로 허용하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그 돌침대를 보면 기억하시려나, 이 공간와 당신의 노년을.


할머니가 오신지 하루만에 엄마의 삶은 다시 꼬여버렸다.

치매가 시작된 후 꼬박 10년 가까이 엄마는 할머니를 지근거리에서 돌봤다. 평생 키운 외손녀조차 깜빡거리기 시작할 때쯤 엄마는 꺼이꺼이 울며 할머니를 집에서 20여분 거리 요양시설에 보냈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그 3년의 정전이 고작 하루만에 전쟁 상태로 전환한 것이다. 허무한 일이었다.


할머니가 오신 직후 코로나에 확진돼 일주일간 격리 생활을 한 나는 출근과 일이 겹쳐 2주만에 겨우 본가에 들렀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와 할머니를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다음 일정을 기억하지 못해 우물거리던 나에게 엄마는 정확히 5초만에 짜증을 왈칵 내며 "너 맘대로 살아라"라고 쏘아붙인 뒤 할머니를 모시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시보다 날카로운 엄마의 기세에 눌려, 그리고 갑자기 감정의 배출구가 됐다는 생각에 불현듯 화가 나서, 나는 바로 내 집으로 도망쳤다. 돌아오니 미안했고 슬펐으며 안타까웠다.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의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든 평생 누군가를 책임지여 살아야 했던 나의 할머니는 80여년간 누리지 못했던 평온함 속에서 사는 듯 보였다.

결혼 일 년만에 집을 나간 남편. 홀로 외동딸을 키워야 했던 20대 초반 여성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온갖 공장을 전전하다 일수를 시작했다. 신촌 바닥을 헤집으며 일수를 걷던 악착같은 여성은, 과거 90년대 중반 손녀에게 줄 간식을 사러 가다 차에 치여 3미터를 날아갔음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 "에잉, 무릎에 피가 나네"라고 혼잣말한 뒤 곧바로 자리를 뜰 만큼 초인적으로 강인했다. 그런 이가 저토록 느리게 움직이며 말도 없이 몇 시간동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참 믿기지가 않았다.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은 참 맑았다. 이건 슬픔일까 안식일까. 나는 알 수 없어 "할머니, 뭐 불편한 것 있어?"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괜찮아요"라고 답한 할머니는 집에 온 일주일간 오줌을 네 번 지렸고 엄마는 일주일에 네 번 이불빨래를 하며 그저 울었다고 하더라.


출근하지 않은 주말, 장을 보러 간 부모님을 대신해 반나절 할머니를 혼자 돌봤다. 너무 힘들었다.

식사를 거들고 화장실을 도우며 옷을 입히는 건 오히려 괜찮았지만 문제는 자꾸만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는 외할머니의 돌발행동이었다. 오후 두세시, 할머니가 꾸벅거리는 듯하여 침대에 눕히면 정확히 10초만에 할머니는 이불을 박차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2분에 한 번씩 현관문 앞에 서있는 할머니를 막고자 신발을 숨겨봤지만, 그 다음 어느새 도어락을 열고 있던 할머니는 내 흰색 운동화에 야무지게 발을 넣어두고 계셨다.

동생까지 둘이 붙어 할머니를 말렸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설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할머니는 자꾸만, 로봇 청소기처럼, 현관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할머니는 자꾸만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영양만큼 순한 초식동물이 된 할머니에게 현관 밖 세상은 그야말로 사파리 정글 아닌가. 할머니의 사라진 인지능력을 그저 잘근잘근 물어뜯는 세상의 차가움만 가득할텐데. 아무도 없는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몰라 빙빙 돌 그 세상을 그토록 보고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니 사람은 외롭고 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고, 그런 노력이 쌓여 문화가 되고 문명이 만들어졌다고, 대학교 사회학 전공 수업에서 그런 말을 얼핏 들었지만 그 문명의 끝인 현재에도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아는 법을 끝끝내 파악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 지구 건너편 억만장자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씨부리는지 실시간으로 이해하는 나는 그래서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든 할머니의 생각을 아마 평생동안 알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알지 못할 바에야, 할머니의 생각이란 행복으로 가득할지 불행이 뭉게뭉게 퍼져있을지 모르겠다만 요새는 그냥 전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살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볼 수 없는 그녀의 머릿속 마지막 나날들. 외동딸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인지능력에 이르렀기에, 나는 그녀의 시간을 '일상'이라는 단어로 부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떠나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만의 세상이 이제는 낙원이길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일상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세상이 그저 시간이 흐르게 두는 어떤 고요한 무(無)의 세상이라도, 그 시간이 평온하거나 혹은 안정적이었으면 좋겠다.


외할머니가 머리에 낙원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나는 쇼파커버를 뒤집어씌운 내 집의 돌침대에 누워 기도한다.

당신이 이룩한 일들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기에.



멀리멀리 가던 날

데려온 노래는 들리지도 않고

날아오를 듯이 가볍다가

고갤 떨구면 가장 낮은 곳으로

이유도 없이 나는 곧장 섬으로 가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섬으로 가네

조심하며 걸어도 발소리는

아무도 없이

개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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