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ho Dec 23. 2022

유럽인들의 겨울 여행지

나의 12월 스케줄은 유럽 비행이 제법 많이 나왔다.

핀란드 헬싱키에 베이스를 둔 우리 회사의 유럽비행은 공항만 찍고, 체류는 하지 않는 단기 비행.


뉴욕에서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마이애미의 따뜻한 해변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짧은 비행은 체력적으로 수월하고 나는 해외 호텔이 아닌 집으로 퇴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이런 사소한 아쉬움을 갖고 12월 2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일곱 개의 유럽 비행을 해냈다.

(이 중 네 개는 두 나라를 연달아 왕복하는 더블 비행. 아이고 허리야...)


역시 12월은 크리스마스의 달이라 그런지 유럽 대륙을 오가는 비행기 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도 덩달아 신났다가, 부러움에 배 아팠다가, 기분이 들쑥날쑥 했던 나의 비행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한다.

유럽인들은 겨울에 어디로 떠날까?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

이 짧은 기간에 베를린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비행기를 꽉 채운 승객들의 대부분은 출장객도 여행객도 아닌 듯 보이는 무덤덤한 표정의 핀란드인 어른들.

나이 지긋한 사무장에게 물어보니, 이 시기에 핀란드인들은 크리스마스 마켓 방문을 가장하여 겸사겸사 독일에 다녀온다고 한다.


핀란드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긴 하지만, 수도 헬싱키만 해도 그 규모가 독일의 마을 수준, 3년에 걸쳐 겨우 세 번  본 나도 상인들과 그들이 파는 물건까지 제법 눈에 익을 정도니 지방은 말해 뭐 해 수준이 아닐까.


집안의 어린이들에게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선물을 찾기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하기에도 반박의 여지가 없는 곳, 독일.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가장 유명한 스트라스부르도 내가 가봤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쾰른, 뮌헨에 비하면 시시했다.


독일의 수도인 만큼 베를린 안에서만 열리는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의 수만 해도 약 80개. 헬싱키에서 베를린까지는 비행기로 고작 한 시간 반. 베를린에 가는 사람들이 어디 핀란드인들 뿐이랴. 로마, 파리, 런던에서 출발해도 베를린까지는 두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도 가고 싶구나,

베를린.


스페인의 카나리 섬.

일곱 개의 섬으로 구성된 스페인의 카나리 제도. 이 중 테네리페, 라스 팔마스, 푸에르떼 벤뚜라, 란사로떼 섬은 유럽인들의 '햇살 성지'로 유명하다. 유럽 전체가 영롱한 햇살을 가득 받는 여름에도 카나리 제도 섬들은 저렴한 비행기 티켓과 편리한 시설의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로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추위가 혹독한 겨울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노르웨이의 오슬로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각각 두 번씩 왕복하며 작은 비행기에 무겁게 실어 나른 승객들의 두 번째 다수가 향하는 이곳.


나도 프랑스에 살면서 란사로떼 섬의 올 인클루시브 호텔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묵은 호텔은 거의 100프로가 프랑스인 투숙객이었고, 옆 호텔은 영국인들, 옆옆 호텔은 독인인들로 차 있었던 그곳. 저가항공과 호텔까지 왕복 교통편, 식사 모두 포함해서 파격적인 가격이라 다른 곳과 비교할 것도 없이 내 검지 손가락이 알아서 온라인 여행사를 통해 예약 척척. 다녀온 소감은 '그냥 무난했다'가 전부이지만, 가격이 너무 매력적이라 '재방문 의사 있음'에 동그라미 치게 되는 곳.


여름휴가를 쓰고 남겨둔 일주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겨울 휴가, 눈이 펑펑 내리며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북유럽에서 따스한 햇살을 영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

정답은,

위에 파란 글씨.


태국의 방콕.

두바이에 베이스를 둔 항공사를 다닐 때에는 두바이보다 조금 덜 더운 방콕에 휴양을 가는 승객들은 드물었다. 주로 방콕을 경유해서 호주와 같은 타국가로 이동하거나 이미 두바이에서 한 번 경유를 하여 지칠 대로 지친 채로 방콕으로 향하는 승객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헬싱키에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스칸디나비안 어른이들, 아니, 어르신들.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라다이스의 꿈을 갖고 흥분이 고조된 채로, 비행기가 붕 뜸과 동시에 파티가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오슬로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각각 두 번씩 왕복하며 작은 비행기에 무겁게 실어 나른 승객들의 첫 번째 다수가 향하는 이곳.


헬싱키에 도착을 해야 비로소 방콕행 비행기를 탈 수 있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걸 못 기다린 키다리 아저씨들에게서는 이미 독한 술 냄새가 난다.

오전 아홉 시 반, 오슬로. 탑승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두툼한 점퍼 안자락에 숨겨 온 작은 술병을 꺼내 수혈하듯 한 모금 냅다 마시는 덩치 큰 아저씨 발견.

뒤에서 슬며시 다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봤거든요"

하고 주의를 주니, 아직 술기가 제대로 달아오르지 않은 그는 당황한 기색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비행기가 뜨자, 가지각색 술을 찾는 사람들. 이 짧은 노선에는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말에 역시나 어린아이처럼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오슬로에서 헬싱키까지는 약 한 시간.

이들과 함께 해야 할 시간이 헬싱키-방콕처럼 열한 시간이 아니라 휴~ 다행이다.


핀란드의 로바니에미.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탑승이 시작되었을 때, 서른 명이 넘는 어린이들과 가족 티셔츠를 맞춰 입은 어른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 유치원에서 단체여행을 떠나는 줄 알았다.


4인이 넘는 가족들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어쨌든 일렬로 앉았고,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까지 삼대가 함께하는 가족들도 밝게 빛나는 빨강니트를 입어 다른 가족들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옷은 산타 할아버지 혹은 루돌프가 그려진 호호호 니트 (Hohoho).

마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운동회라도 열 것처럼 가족별로 맞춰 입은 단체 티셔츠. 알고 보니 서로 모르는 개별 가족 여행자들이었지만 이들 모두가 향하는 곳은 동일하게도,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


아이들이 한 살이라도 더 먹어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기 전에 부랴부랴 떠나는 듯, 아이들의 나이대가 대략 비슷해 보인다.

밝은 색상의 니트에 쓰여있는 문구만큼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매일 보는 가족끼리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 호호.

평소에는 점잖은 영국인들이지만, 산타를 보러 가는 마음이 통했는지 어느새 앞, 뒤, 옆 가족끼리 친해져 선물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다.


겨울시즌 동안, 헬싱키에서 로바니에미로 가는 우리 회사 비행기만 하루에 5-7대.

결국엔 산타 할아버지도 극한 업인 걸까.




산타 할아버지 보러 갈 때 필수품, 호호호 니트.


이전 29화 아이슬란드에 대해 몰랐던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