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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Oct 12. 2021

3. 복지가 있고 없음에 대하여

일요일엔 도시락을 싸고, 금요일엔 다 같이 청소를 하는 삶

이직한 회사는 직원이 1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회사다. 이전에는 대기업이었으니 복지에서 큰 차이가 있다. 대기업에서는 급식을 줬지만, 지금은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대기업에서는 청소를 담당해주시는 분들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은 금요일마다 다 같이 청소시간을 가진다. 대기업에서는 계열사를 이용할 경우 주어지는 할인이나 특권이 있지만, 지금 회사는 그런 부분이 거의 없다. 대기업에서는 놀러 다니라고 여가 활동비를 줬지만, 지금은 당연히 없다. 대기업은 종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지만, 지금은 스스로 예약을 하고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내 삶이 대단히 많이 불행해졌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굳이 복지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회사의 복지를 회사 선택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복지들을 좋은 회사의 기준으로 삼곤 한다. 이직을 해보니 작은 기업의 동료들은 대기업의 복지들에 대한 환상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나도 복지가 없다는 점 때문에 작은 기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이 복지라는 게 참, 회사의 큰 요소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작은 기업으로 이직을 생각할 때 두려웠던 것은 내가 청소를 하고, 내가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대기업을 오래 다니면서 생각보다 많이 오만(?)해졌던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평생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던 것 같다. 누군가 힘든 일을 대신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난 그렇게 사는 삶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청소를 내가 하지 않으니 깨끗하게 쓰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집에서도 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삼시세끼 해결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뭐하나 할 줄 모르던 나는 이래저래 퇴사를 결심하고, 작은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을 했으니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도시락을 싸야 하는 불편함, 청소, 줄어든 상여금… 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자기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잘 해내고 있다. 도시락은 평소 해보고 싶었던 채식 위주의 식단을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즐겁게 싸고 있다. 아, 물론 전의 회사에서도 샐러드를 골라먹을 수 있었지만 맛이 없어서 안 먹게 되었더랬다. 그렇게 생각보다 괜찮은데? 너무 겁을 내고 살았구나. 라며 살던 중에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이사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하는 과정은 너무 괴로웠다. 반포장 이사를 하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잔 짐이 너무 많아 저녁 9시까지 짐을 싸게 되었다. 그 수많은 이삿짐을 직원들이 다 싸고 날라야 했다. 안 하던 일을 하며 몸을 쓰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괜히 나왔다는 생각도 슬그머니 올라오기도 했다. 뭐 이미 무를 수도 없지만… 아직도 돌이켜보면 그때가 이직을 하고 제일 서러웠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이사는 그 순간이 끝이 아니었다. 계속 새로운 가구가 왔고 점심시간마다 조립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현타가 정말 세게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사 시즌도 지나가게 되었고, 평화는 다시 찾아왔다. 요즘은 만족하며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불편한 게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회사에 복지가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하지만 복지가 내가 일할 터를 결정지을 정도로,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것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같은 괴짜도 있다는 것이다. 복지는 비록 별거 없지만 대신 나는 더 값진 것들을 작은 회사에서 얻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즐거운 일에 몰두하며 보내는 시간들.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대표님들과 동료들. 나는 이런 것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란 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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