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건 오히려 대기업에서 불행하던 과거의 나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회사 안이 정글이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다. 회사 밖으로 떠난 사람들이 나보다는 어느 정도는 불행을 안고 있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는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가 회사에 남아있는 당위성이 생기기 때문이었을까.
일하면서 보람을 느껴본지가 참 오래되었었다. 대기업에서는 모든 것이 시스템화 되어 움직이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부품에 지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대기업이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떤 회사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을 회사의 경영진이 어떤 비전이나 방향성을 설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방향성에 맞게 일을 해왔기 때문에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업이 시스템을 갖추고 돌아가기 시작하면, 결과물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좋아한다고 해서, 대기업에서 돈 받고 일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회사가 남성적이고 테키한 디자인을 원하면 나는 그에 맞춘 디자인을 해내야 한다. 그것은 그 회사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방향,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회사의 경우도 추구하는 방향성과 비전은 있다. 하지만 작은 회사는 그 방향성이 아직 말랑말랑한 느낌이다.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변화한다. 자본으로, 시스템으로 회사를 연명해 나가는 것은 대기업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작은 기업의 경우 계속해서 더 좋은 방향, 더 좋은 비전을 찾아 나서는 느낌을 받았다. 매 프로젝트가, 매 순간이 성장의 관문같이 느껴지고, 그게 무엇이든 잘 끝나면 정말 기분이 좋고 보람이 있다. 그리고 나도 일을 할수록 성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 그 자체가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이 나의 가치관과 맞고, 그 회사가 잘 될수록 내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사람은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동료 직원 분께서 나중에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대기업까지 박차고 나온 나 같은 사람은 뭘 하고 싶어서 나온 건지 궁금하셨던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요즘 어떤 구체적인 스펙이나, 연봉, 커리어를 목표로 삼은 적이 없다. 단지 최선을 다해서 결과물을 내고, 그 결과와 내 이름이 같이 언급되었을 때 자랑스러울 만한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아, 그리고 이 작은 회사가 제발 망하지 않고, 앞으로도 많이 성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