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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Oct 16. 2021

Outro. 장래희망이 있었습니다만

날 사랑해주기 위한 선택!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으면 디자이너라고 적곤 했다. 근데 그 꿈을 위해 달려 꿈을 이루고 나니, 장래 희망이라는 게 ‘직업’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맞지 않는 옷이었던 대기업. 퇴사 직전 봤던 유튜브 영상이 생각난다. 아마도 행복에 관한 다큐였다. 다큐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은 본인에게 맞는 목표로 나아가야 하며, 그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도 즐거워야 하는 거라고 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시험만 합격하면, 어떤 회사에만 들어가면, 어떤 목표만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그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도,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도, 목표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단다. 그래야 내가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이 되는 것이니까. 혹은 목표를 이루었을 때 내 예상보다 행복하지 않아도, 후회가 없을 테니까.


난 회사에 들어간 후 오랜 시간, 20대 내내 맞지 않는 곳에서 표류했다. 목표도 없었다. 분명 행복한 경험은 아니었다. 상처도 많이 받았고, 정말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도 많이 남겼다. 그 순간들에게 고마운 점은 딱 하나다. 내게 맞지 않는 곳을 알게 되었다는 점.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작은 기업을 첫 직장으로 가진 주변 친구들이나 동료들은 불만이 생기거나 했을 때 대기업으로 이직을 하면 그 문제들이 해결될 수도 있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꼭 대기업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가보는 걸 추천한다. 갔다가 안 맞으면 나오면 그만이니까. 나처럼 그곳이 정답이라고 계속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다. 보편적인 남들의 기준에 내 인생을 욱여넣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결국 인생은 자기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남들이 말하는 기준 말고, 정말 자기 자신에게 맞는 곳이 어딘지 찾고 싶다면 도전해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남의 경험담은 결국 그 사람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참고는 될지라도, 결국 내가 직접 경험했을 때 어떨지는 스스로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나는 대기업이 안 맞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잘 맞아서 즐겁게, 아니면 그냥 영혼 없이 다닐 수도 있다. 난 영혼 없이 다니고 싶어도 그게 잘 안돼서 결국 잘 안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온 것일 뿐이다.


난 어디서 일하던지 그 누구도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도, 기업의 규모도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그런 편견은 세상에 만연해 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도 살아봤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난 꽤나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다들 연봉을 백만 원이라도 더 높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워라밸을 외치고, 복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살아가는 와중에 일을 더 하는 게 행복하다며 야근을 해도 행복하다니.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은 몇 없다.


오징어 게임에 나온 조폭 역할의 허성태 님의 ‘말하는 대로’ 강연을 보았다. ‘마흔 살의 이기적인 남자, 신인 배우 허성태입니다.’라는 소개가 잊히지 않는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서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며 배우의 꿈에 도전하셨다는 강연이었다. 나도 내가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고 계속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가족의 행복, 부모님의 기대에 나 자신을 맞췄던 그 심정이 너무 이해돼서였을까. 뺨을 맞아도 행복한 일을 한다는 게 감사했다는 그분의 이야기가 야근을 해도 좋은 내 마음과 비슷하게 느껴져서였을까. 코 끝이 괜히 찡해졌다.


며칠 전 병원에 정기 검진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아무 특이점이 없는 결과를 받았다. 잠도 잘 자고 건강하게 잘 먹는다. 날씨 좋은 날의 점심시간, 혼자서 회사 옆에 있는 작은 공원을 거닐며 삶이 늘 지금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이 정도면 난 나에게 꽤나 좋은, 사랑을 담은 선물을 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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