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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Apr 28. 2022

모든 게 싫은 날에도 나를 미워하면 안 되니까요.

시지프스가 되려는 나를 구하기

빗방울이 거세지던 오후, 한창 업무에 빠져있는 중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학원 가는 길에 어떤 누나가 밀어서 넘어지는 바람에 옷이랑 가방이 다 젖었어."

누가 밀었는지 기억나냐니까 그 누나가 '미안'하고는 까르르 웃고 갔답니다. 아들의 동문서답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립니다.


마우스를 다시 잡으려는데 연거푸 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엄마, 내일 친구 생일인데 다른 친구랑 선물 사러 갈 건데.. 학원 빠지고.... 가도 돼?"

"학원 마치고 가도 되잖아."

"같이 가는 애는 학원 빠지고 간다 했단 말이야."

"학원 다니지 마, 그럼."

후회할 말을 수화기에 내뱉습니다. 이 후회가 이번엔 어떤 모양새로 돌아올까 걱정하다가 작업 중인 창 구석의 X를 누릅니다. 누른 김에 가방을 쌉니다.


퇴근해서 현관문을 여니 빗물에 푹 담긴, 아들의 운동화가 저를 맞이합니다.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퇴근하면서 30분 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거짓말입니다. 운동화가 품은 비릿한 빗물 냄새를 30분 일찍 맡았을 뿐입니다. 신발장을 열어 아이들의 작아진 신발을 챙기고, 젖은 운동화를 비닐봉지에 담고는 현관에서 바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세탁소 가는 길에 멍청히 서 있는 헌옷수거함의 입 속으로 작아진 신발들을 조금, 세게, 집니다. 세탁소에 운동화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세면대에 양치컵이 떨어져 있습니다. 컵 손잡이에 낀 분홍 물곰팡이가 더 선명해 보입니다. 냉장고엔 몇 주 전 대형마트에서 샀던 케이크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직장동료가 텃밭에서 키웠다고 먹어보라며 담아준 상추가 납치당해 온 것처럼 냉장고 한 켠에서 숨을 죽이고 제 눈치를 봅니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 김 빠진 콜라가 위로해 주겠지요. 동병상련을 느낀다며.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이 굴러다닙니다. 딸의 것인지 저의 것인지 모를. 긴 머리 여자가 둘이나 살아서 우리집 바닥은 머리카락 부자입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집어 올립니다. 쓰레기통 페달을 밟자마자 가득 찬 쓰레기통이 이미 다 찼는데 뭘 또 버리냐며 머리카락 뭉치를 도로 뱉어냅니다.


도르르 회전하는 머리카락 뭉치를 멍하니 바라보는 저를 전화 벨소리가 부릅니다. 미용실에 머리 자르러 간 아들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예약한 사람이 안 해주고 다른 사람이 해 줘. 그리고 예약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기다렸어."

머리카락 뭉치가 도르르 구르다가 저를 올려다봅니다. 당장 미용실로 가서, 분홍 곰팡이와 젖은 운동화와 세탁소에 간 걸음에 대해 항의하라고 다그칩니다.


바스락.

발바닥에 밟힌 과자가 찐득하게 크림을 뿜어내며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네가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 아마  자기 단골 미용사에게 달려가서 괜히 심통을 부리겠지. 그 미용사는 또 단골 미용사에게 가고... 그 미용사는 또...'

미용사끼리 머리를 뜯고 싸우는 만화 같은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어지럽습니다. 얼른 물티슈를 꺼내 과자 조각을 닦습니다.


문득 딸의 전화가, 아들의 운동화가, 분홍 곰팡이가, 납치당한 상추가 그리고 바깥에 내리는 비가, 음침한 이 조도가 모두 다 하나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에 제 마음의 어둠처럼 내렸습니다.


샤워를 끝내고 '일체유심조'를 뿌예진 거울에  봅니다. 글자가 힘없이 금세 흐려집니다.

제 멋대로 가려는 마음은 왜 이리도 힘이 세고 영악한지요.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잠시 눈 돌리는 사이 망설임 없이 직진해서 저 멀리 가버립니다. 그럴싸한 핑계는 100살을 산 사람처럼 능청스럽게 찾아냅니다.


시지프스처럼 의미를 잃은 일과를 반복하다 아차, 싶어 저를 다시 돌아봅니다. 이렇든 저렇든 저는 제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옷가지가 흩날려도 저는 저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속 깊은 사정을 제가 알아줘야지요. 아픈 마음을 제가 읽어야지요.

오늘도 도망가지 않고 열심히 하루를 살아낸 자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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