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나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그 가난은 나의 일부였고, 나를 이루는 중요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가난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끔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그 가난이나 불행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이렇게 밝은데? 잘 컸네.'
'그래도 지금 이렇게 잘 웃고 있잖아.'
그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려는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꼬여버린다. 그들의 의도대로 위로를 받거나 위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내 삶이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가난하거나 어려운 삶을 살았던 사람은 밝으면 안 되는 걸까? 잘 웃으면 안 되는 걸까? '가난하게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내 과거의 가난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소중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이 오히려 나의 삶을 지우라는 말처럼 들린다. 결국 나는 내 과거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내가 내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는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왜 자기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며, 이미 친밀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속내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대단한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속내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나만의 보호 본능이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권리이고 자유이다. 그런데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이 정말 나와 친밀한 사람일까, 다시 만나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이 마음대로 사람을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또 웃으며 만나게 되고, 같은 생각을 하며 돌아오곤 한다.
물론 친밀함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쌓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나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 한다. 정작 자신에 대해 솔직히 나누는 사람들은 나에게 묻지 않는다. 나도 다른 이에 대해 잘 묻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내가 내 이야기를 하지 않듯, 그들도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싫을 거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올 거라 믿고 기다린다. 그러면 언젠가 말한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던 것들을 말해준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도 말하게 된다. 그게 친밀함이라 생각한다. 캐내어 물어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 꺼내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냥 나라는 사람이 앞에 있고, 나에 대해 말을 아끼는 나를 인정해주면 안 되는 걸까. 인정이란 것은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름을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마냥 힘들거나 우울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때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가 더 힘들고 우울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제 삶을 온전히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니, 그 모든 제 삶을 말로 설명해도 끝까지 알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게 설명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제 스스로 꺼내 놓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땐 그냥 '아, 그랬구나' 하고 눈 한번 마주쳐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