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동경 디아스포라

by 수수

처음 내가 이 집에 왔을 때

내 방이라고 소개해준 방이 있었다.

그 방은 볕이 잘 들어서

가장 늦게까지 따듯하고 밝은 방이었다.

언젠가 내 공간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주었던 걸까?

10년 전의 내가 <이터널 선샤인>에 대해 남긴 후기

나는 늘 다정한 마음들을 곧장 눈치채지 못하고

나중이 돼서야 종종걸음을 하고 쫓아간다.

이런 나에게 기록하는 습관은 참 다행이다.


지금 내 방은 그 밝은 방 하나뿐이 아니다.

맞은편에 있는 어두운 방도 반절은 내 겨울옷 차지고

옷장과 책장이 있는 방도 내 방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방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과 부엌 중간에 있는

식탁에서 보내고 지금도 식탁에 기대 글을 쓰고 있다.

혼자인듯 혼자 아닌 혼자 같은 시간

혼자만의 공간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인 내가

외로움을 못 느끼거나 외로움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진짜 외톨이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도 괜찮고 혼자서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

안정적인 관계는 내게 가장 큰 힘을 북돋아 준다.

오빠가 포착한 그림자 트리


디아스포라는 사랑의 미래다

어느 공동체, 이를테면 국가, 민족, 종교 등이나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의, 개념, 논증 등
지금의 보통의 것 혹은 상식적인 것에 소속되는 것을
다 같이 포기하게 될 미래
누군가의 곁에만, 사랑에만 속하게 될 그때에는
아무도 낙오되지 않기를
_어느 날의 단상 1


그날도 저녁을 준비하면서 팟캐스트를 들었다.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주제였다

난 너무 쉽게도 그 논쟁에 극히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내용을 전부 다 듣고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내 선택은 오롯이 내 죽음에 대한 입장이었다.

나 아닌 사람들과 여타 생명들이

고통을 피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경우 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역시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피하고 싶지만

당신은 비극에 맞서 생명에 책임과 최선을 다하기를,

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살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난

여전히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동시에 나는 내 이기심에 좌절하지 않고자

이 마음들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향했고

급작스럽지만 이거 사랑인데?라는 생각에 환승한다.

근거는 영성가 성 베르나르가 주장한 사랑의 단계.

'원초적인 사랑은 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보다 높은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가장 성숙한 수준의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나를 사랑한다'

사람+사랑=삶

죽음을 고민했는데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내 생명, 내 삶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오로지 나 자신으로만 향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전부 포기할 것처럼 위태롭지는 않았는지.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한다는 헌신과 희생들은

마음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피로로 쓸쓸하게 몸져눕지는 않았는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생명에 최선을 다하고, 내 삶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냘프고 약하게 느껴지지만

이상하게 아름답고 따듯하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살 가치가 있게 되기 위해서.’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고통의 계절은 누구든 언제든 피하고 싶지만

그 자리에 사랑이 있다면 마주하고 버텨낼 용기가

보석처럼 기적처럼 생겨난다고 믿는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결국 다 지나가겠지만

사랑은 지나가지도 고여 있지도 않고 함께 생동한다.

사랑도 살아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최선을 다해 그 자신의 생명과 삶을 살아내고

견뎌낸다고 믿는다. 우리들 곁에서.

떨어진 꽃들 사랑스러워 하는 취향
憧憬, 東京

동경은 동경일 때 동경이다
동경이 익숙함의 옷을 입으면 누추해져 버린다
동경은 친절하지만 다정하지 않아서
동경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삶은 결국 내 마음을
더 넓게, 더 깊이 움직이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정함의 세계가 동경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고 믿는다면
_어느 날의 단상 2


떨어진 꽃잎에 애정을 품는 나,

그림자를 잘 포착해 담아내는 오빠.

은은하게 닮아있는 우리 둘은

오늘 저녁도 다정한 식탁에 마주 앉는다.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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