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이라는 여정과 그 무료함에 관하여.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지 않다와 해야만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를 나는 여전히 교차시키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하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조차도 문득 다가온다 나에게만큼은 적어도
나의 발버둥이 발버둥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찼기 때문일 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설렘이,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력이 꽤나 좋은 편인 내게 희미하다 못해 느껴지지 않았기에.
짧았기에 설렘일까, 설렘이기에 짧은 것일까를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스치듯 나를 치고 간 그 설렘이 그리웠다. 지나간 사랑처럼, 지나간 사람처럼 그리고 지나간 시간처럼 말이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사람이었고,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기억이니까. 이는 나의 기억법이고 추억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 스친 설렘을 추억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장소를 바꾸기로 결심해야 했고, 장소를 바꿔야만 했다. 내가 난 곳으로.
장소를 바꿈으로써, 나는 내가 나지 않은 곳에서의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롯이.
2019년 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무뎌갈 즈음 운명처럼 아니 우연처럼 난 곳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언젠가 어렴풋이 할머니께 들은 바다에 쌓여 있는 그 회사와 3월의 봄 속에 인연을 시작했다. 마치 이제는 봄이 온 것이라며 슬픈 착각을 하며.
봄 그리고 바다 그리고 봄이 온 줄만 알았다.
너무 큰 기대는 너무 큰 실망을 안긴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큰 기대 또한 내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겼다.
익숙함이 낯설 수 있다면 그것은 익숙함이 아닐 것이다. 친숙함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미 내 시간은 18년 10월 이전과 같을 수 없음에, 난 곳 또한 내겐 낯설 수밖에 없고, 낯설어야만 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것과 돌아갈 곳이 없음의 차이가 나의 지난 시간들을 지탱해주었다. '언젠가 아니 언제라도 나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라는 기둥이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의 불균형과 불안함을 지탱해주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나를 반겨줄 고향과 가족이 있으니까. 이 또한 내겐 너무 큰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의 바다와 직장으로서의 바다는 바다 본연의 성격만큼이나 출렁였다.
바라봐왔던 그 바다를 나는 다시 바라보며, 더 깊은 고독, 외로움 그리고 슬픔에 잠겼다. 내가 기대해온 바다는 이게 아니었는데.
퇴근 후의 바다인데도 바라보는 것이 구슬프다.
이 사진이 좋은 건 그런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 큰 기대는 너무 큰 실망을 안긴다. 낯섦이 익숙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낯섦이 아닐 것이다. 익숙함도 아닐 것이다. 익숙했던 나의 시간과 장소가 낯설어졌다. 장소가 달라졌음에도.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