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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Nov 06. 2024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불안했다.

그런 나날들이 나를 다시, 조금씩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병가휴직 125일째였다. 일곱 시에 울리는 알 수 없는 종소리에 잠에서 깼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다시 눈을 감았고 아홉 시에야 일어났다. 아홉 시 반에 침구를 정리하고 가벼운 콘푸로스트로 식사를 마쳤다. 몇 해 전 읽다 중단했던 책 <7년의 밤>을 다시 들고 200페이지를 넘기니 당시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그때도 생각보다 많이 읽어두었구나 싶었다. 어제의 술자리 탓인지 속이 불편해서 힘없이 엎드린 채 독서를 이어갔다. 일본에서 사 온 약을 먹고 나니 속이 차츰 편안해졌다.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유가네 닭갈비를 해 먹었고, 주말을 기념해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나문희와 이제훈이 출연한 아이 캔 스피크였다. 숨겨진 명작이라 할 만했다. 위안부 할머니와 관련된 내용이었고 코믹 요소와 감동이 잘 배치되어 있었다. 명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끝까지 재미있게 감상했다. 특히 나문희의 연설 장면은 명장면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평화로운 일요일을 만끽했다. 요즘 계속 쉬다 보니 요일 개념이 흐려져 가고 있었지만 이날은 정말 일요일다운 하루였다.


병가휴직 126일째. 아홉 시에 기상해 침구를 정리하고 책을 읽었다. 속이 편하지 않아서 오전 내내 힘이 없었고 입맛도 없었다. 점심 무렵 아내가 혼자 식사를 할 때 나는 뒤에서 졸다 깼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오후 세 시 반이었다.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속이 나아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으려 애썼다. 저녁에는 참치죽을 먹었다. 역시 죽이 가장 속을 편안하게 해 준다. 이후 쓰레기를 처리하고 택배를 수령하러 외출했다. 오랜만에 택배를 뜯어보니 좋아하던 책 <수퍼내추럴>이 도착해 있었다. 간만의 여유를 만끽하며 게임을 즐기다 밤이 깊어졌다. 아내와 함께한 평온한 하루였지만 느긋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꽤 만족스러웠다.


병가휴직 127일째. 열한 시 기상. 밤새 게임을 즐기다 새벽 네 시에 잠들었더니 크게 늦잠을 잤다. 아침에 책을 들고 <7년의 밤>을 다시 읽었다. 300페이지를 넘었지만 쉽게 넘어가지 않는 답답함도 있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로웠다. 오후에는 골프 연습장에 갔다. 예상치 못하게 장인어른을 만났다. 그동안 잘못된 그립 자세를 바로잡아 주시며 새로운 자세를 보여주셨다. 몇 년간의 습관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싶었다. 저녁에는 블로그에서 추천한 족발을 먹으며 영화 <아빠는 딸>을 감상했다.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감동을 느꼈다.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하루였다.


병가휴직 128일째. 열한 시 기상. 아침에 일찍 깨었으나 다시 잠에 들었고, 그사이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어학원에 있었고, 회사에서 보낸 프로그램이었다. 다들 기숙형 생활에 만족하며 어학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나는 짧은 교육 후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했다. 점심 후에는 아내의 팔을 베고 누워 네 시간가량 낮잠을 잤다. 저녁 후에는 드디어 며칠간 읽던 <7년의 밤>을 다 읽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과 진실을 알고 마주했을 충격을 이해하며 작가의 놀라운 서사력에 감탄했다. 여유 없이 지내다 드디어 읽어낸 성취감이 밀려왔다.


병가휴직 129일째. 아홉 시 반, 놀라서 눈을 떴다. 아내를 쉬게 하려고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어머님께서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귀찮아하는 모습에 순간 애처로웠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시외버스에 올라서 수업에 참석했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문이 잠겨 있어서 기다리다 여러 번 올라가며 확인했다. 수업 시간을 십분 남기고 문이 열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수업에 들어갔다. 은둔과 마무리에 대한 수업에 예전 기억들이 떠올라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집에 돌아와 범죄도시라는 영화를 보며 마무리했다. 잔인했지만 마동석의 존재감이 대단했던 작품이었다.


병가휴직 130일째. 아홉 시 기상 후 침구를 정리하고 모처럼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어머님과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콘푸로스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게임을 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집 청소를 시작했다. 이불을 털고, 버릴 것들을 정리한 후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마쳤다. 깔끔한 집에 아내가 돌아와서 웃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저녁엔 다시 게임을 즐겼다. 한 달 넘게 건드리지 않았던 게임을 다시 시작하니 새로웠다. 그날의 여유가 길고도 짧게 느껴졌다.


병가휴직 131일째. 아침 일찍 눈을 떠 인터넷 서핑을 했다.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라 무언가 얻을 수 있을까 한참을 살펴보다가 그만뒀다. 최근 읽기 시작한 <죽음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었다. 책은 유명한 강좌의 내용을 담고 있어 흥미로웠지만 교수의 강한 주장들이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외출해 공을 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극심한 교통 정체로 오래 걸렸지만 아버지와 전화 통화로 무료함을 달랬다. 아버지와의 짧은 대화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소중했다. 저녁은 간단하게 패스트푸드로 해결했는데 만족스러웠다. 밤에는 다시 책을 들었으나 졸려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내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책을 80페이지쯤 읽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영혼이란 정말 있는 걸까 하고 문득 생각에 잠겼다.




휴직 기간 동안의 하루하루는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불안했다. 아침에 울리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뜨고 다시 잠들며 시작된 날이 있었고, 속이 편하지 않아 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은 새로운 발견과 작은 성취를 위한 시간이었다. 읽다 만 책을 다시 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무거운 하루를 보내던 날에는 아내의 팔에 기대어 잠시 쉬었고, 때로는 집안일을 하며 단조로운 일상 속에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작은 기쁨, 뜻하지 않은 순간의 여유, 소소한 일상이 쌓여 마음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그런 나날들이 나를 다시, 조금씩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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