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맥커시(Charlie Mackesy)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The Boy, the Mole, the Fox and the Horse)은 단순한 펜 선으로 그려진 존재들의 여정이다. 호기심 많은 소년이 숲에서 만난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 상처 입은 여우, 그리고 현명하고 거대한 말. 이들은 함께 걸으며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주고받는다.
“가장 큰 성공이 뭐라고 생각해?” 소년이 묻자 말이 답한다. “사랑하는 것.”
두더지는 배가 고프면 솔직하게 케이크를 찾고, 여우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멀찍이 따라오며, 말은 묵묵히 모두를 등에 태운다. 소년이 “나는 종종 실패해”라고 고백하면, 말은 “넘어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야. 일어서지 않는 것이 실패지”라고 답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우가 덫에 걸렸을 때다. 두더지가 다가가 덫을 풀어주자, 평생 두더지를 잡아먹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 믿었던 여우는 충격에 빠진다. “친절함이 가장 큰 용기”라는 두더지의 말은 여우의 세계관을 흔든다. 이후 여우는 말없이 일행을 따르며, 결국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은 두더지를 구해낸다.
이 그림책을 펼친 누구나 아마도 한때 소년, 소녀였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 얼굴에는 실패의 흔적들이 주름이 되어 새겨져 있다. 승진에서 밀려난 날, 사업이 무너진 순간, 관계가 끝났던 저녁, 아이의 눈빛에서 실망을 읽었던 아침.
말(Horse)이 “가장 용감한 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도와줘”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중년의 어깨는 ‘도움’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가장이라는 무게, 체면이라는 갑옷. 우리는 여우처럼 상처를 숨기고 으르렁거리며 살아왔다.
두더지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한탄할 때, 말은 “봄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답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작년을 떠올린다. 글쓰기를 빌미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좌천 된 경험. 해고 통지서를 받고 한강다리를 걸었던 어느 직장인의 이야기, 20년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대학 동기의 전화, 부도난 가게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던 자영업자의 뒷모습. 우리는 모두 겨울을 지나고 있었고, 봄이 올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맥커시는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시간 낭비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두더지의 입을 빌려 답한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것.”
페이스북을 스크롤하며 대학 동기의 승진 소식에 속이 쓰렸던 밤들, 고등학교 동창의 호화로운 가족 여행 사진에 초라함을 느꼈던 순간들. 하지만 폭풍우를 지나온 중년은 안다. 그 화려한 사진 뒤에도 누군가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성공이라는 가면 뒤에서 모두가 자신만의 덫에 걸려 있다는 것을.
말이 강을 건널 때 소년에게 말한다. “강물이 거세 보여도, 계속 헤엄치면 건널 수 있어.”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실직 후 6개월간 이력서를 돌렸던 사람, 암 투병 끝에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 파산 후 다시 작은 가게를 연 사람들이 증명하는 진실이다.
이어서 후속작으로 최근 2025년에 출간된 후속작 <언제나 기억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그리고 폭풍우>는 제목처럼 실제 폭풍우를 만난 네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폭풍우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단단히 붙잡는다. 이 책은 “때로는 폭풍우가 우리를 더 가까이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중년의 폭풍우를 지나는 우리에게 맥커시의 그림책은 속삭인다. 당신의 실패는 당신을 정의하지 않는다고. 상처는 약점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두더지의 마지막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집이 뭐라고 생각해?” 소년이 묻자 두더지가 답한다.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야.”
전성기가 지났다고 느끼는 당신에게, 실패의 잔해 위에 서 있는 당신에게 전한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그 폐허가, 새로운 시작의 집이 될 수 있다고. 폭풍우는 지나갈 것이고, 당신 곁에는 여전히 함께 걸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처럼 소소한 기쁨을 찾는 친구든, 상처 입은 여우처럼 경계하다가 마음을 여는 동료든, 묵묵히 등을 내어주는 말 같은 가족이든.
언제나 기억하자! 넘어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않는 것이 실패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