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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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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Aug 27. 2023

자연사 박물관

Natural History Museum


너를 사랑하는 일은 너무 쉬웠어. 그냥 니가 눈에 들어와서, 시계토끼를 따라가는 앨리스처럼 당연한 일이었어.

펄펄 끓는 한여름에마저 뜨거운 커피만 고집하는 것도, 언제나 사람이 죽는 영화만 보는 것도, 운전할 때는 사과맛 자일리톨 껌을 씹는 것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서리에 몸을 맞춰 기대는 것도, 입술을 모았다 떼며 만드는 파열음으로 내 시선을 끌게 하는 것도, 초조할 때는 작게 손톱을 튕기는 것도, 의자에 앉으면 다리를 꼬고 허벅지에 두 손을 번갈아 꼭 네 번을 두드리는 것도,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이는 것도,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와사비를 얹어서 참치를 먹는 것도. 너의 취향과 취미와 입맛과 습관과 그 모든 걸 사랑해.


근데 너는 노력을 해보겠대. 너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구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게 어려운 일이구나. 사는 게 얼마나 재밌을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나도 언젠가 너에게 대가 없이 사랑을 받기만 하던 때가 있었던 거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만들어 내오는 나와 달리 너는 남는 시간에 나를 만났잖아. 미안한 마음에 밥을 먹고 영화를 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겠지만, 즐겁지가 않았을 거야.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어. 미안해하지 말라는 나에게 너는 기어이 미안하다면서 떠나. 꼭 나 같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라면서.


내가 말했잖아. 항상 입씨름하듯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내가 더더 사랑해라고 말했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많이 사랑할 거라고. 언제나 네가 더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괜찮아. 나를 사랑하기 위해 많은 거짓말을 하고 또 많은 노력을 한 거 알아. 날 위해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척도 해보고, 인형 뽑기의 달인인 척해보고, 영화의 해석을 미리 외워왔잖아. 나는 그 거짓말들마저 사랑했어. 더러는 같이 땀도 흘려보고, 현금교환기가 고장난 척도 해보고, 거리가 먼 해석도 비판 없이 들어줬어.


너를 만나고 어떤 세상이 생겼어. 나는 너랑 같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언어를 만들고, 제법 많은 전쟁을 겪고, 침략도 해보고 정복도 해보는 어떤 세상이었어. 이 우주를 허물어야 해. 세계를 다시 처음부터 지어야 하는 건 조금 힘들어. 생일은 언제인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인생영화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대답하는 지겨운 짓을 반복해야 해.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데, 공통점을 찾으면 놀란 척을 해야 해.


"세상에, 그 아티스트를 알아요? 아 진짜요? 상영관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그 영화를 봤어요?"


너는 꼭 나 같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라고 그랬는데, 나는 널 닮은 누군가를 찾아. 나랑 겹치는 교집합이 아니라 네가 갖고 있던 공배수들을 찾아 칠하면서 아, 너도 그랬는데 하는 거야.


"당근이랑 버섯을 싫어해요? 그럼 카레에 감자랑 고기만 넣어서 먹어요?"


너는 카레에는 고기만 있어야 한다 그랬는데, 얘는 감자도 괜찮대. 너보다 편식을 덜해서 좋다. 같이 스프카레를 먹으러 갈 수 있겠어. 이름 모를 아티스트의 재즈를 좋아하고 푸른 보라색을 붉은 보라색보다 더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 나도 생선구이는 좋아하지만 생선이 들어간 국물은 별로라고 덧붙이지 않아. 그러다 언젠가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힘들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사랑을 해.


그렇게 또 한 세계가 생겼어. 이 땅의 풀 한 포기와 개미 한 마리 마저도 사랑하다가 언젠가는 전염병이 돌고, 폭탄이 터져서 다 사라졌으면 좋겠기도 하고 그랬어. 참 다양했어. 어쩔 때는 유토피아, 어쩔 때는 디스토피아, 어쩔 때는 아포칼립스, 어쩔 때는 사이버 펑크, 어쩔 때는 판타지였어. 차마 없애기 아까운 많은 세상이 있었고, 나는 그 많은 우주를 없앴어. 아, 사이버 펑크 세상은 백업파일이 있어서 복구해보기도 했어. 그러다가 다시 영영 휴지통 속으로 보냈지. 그 모든 세상의 끝은 멸망이고 파국이니 다시는 어떤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 세상을 지었다 부쉈다 만들었다 파괴했다가 구축했다가 허물었다가 하는 건 이제 지겨워.


나는 언제부턴가 사라진 우주의 잔해를 보관했어. 항상 세상을 부수면서, 균열이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의 조각들을 모으면서 깨달아. 어차피 떠날 거라면 솔직하게 본모습을 다 보여줘도 좋았을 텐데, 마음에 들려고 꾸미니 힘들고, 그러니 사랑이 쉽지가 않지. 거짓으로 꾸며서라도 '우린 참 많이 닮았어. 사랑하면 닮는다던데'같은 소리를 하고 싶었나 봐.


자연사 박물관에 가본 적 있어? 이미 멸종된 동물의 박제들을 보면서, '아, 멸종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라고 경각심을 갖거나, '더 많은 생명들을 멸종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아니면, '전에는 이런 생명이 살았단다'하고 배워? 나는 그랬어. 어떤 것도 멸종시키지 말아야지. 이런 생명체도 있었으니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해야지 하면서도, 공룡뼈화석을 보며 공룡이 이랬겠다 상상하잖아. 그렇게 미화해서 짜 맞추는 부분들이 있어. '우리 그때 참 좋았는데.'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사 박물관인 게 속상했어. 생명이 자유롭게 살아 숨 쉬는 자연 그 자체도 아니고, 동물을 생포해 가둬둔 동물원도 아니고, 그저 자연사 박물관인 거야. 죽어야만 박제해서 오롯이 가질 수 있어. 모든 게 끝나야만 의미 있어지는 곳. 윤기 없이 마른 털과 빛을 잃은 눈동자를 구경하는 곳. 세상은 사라졌지만 그 기록은 영영 남아서 부유하고 있어.


저 가죽 밑에는 피도 살도 없고 솜만 가득한 걸 알아. 흙먼지와 땀냄새가 아니라 표백제 냄새가 가득해. 나는 아직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껴. 섣불리 한 세상을 파괴하고 다시 박제해서 추억하고 싶지 않아. 그러다 언젠가 같은 궤도로 도는 혜성을 발견했어. 저 별에도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박제되고 싶어. 그렇지 못할 거라면 터뜨려서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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