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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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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Aug 24. 2023

나들이

Excursion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해서, 나들이 정도가 맞다. 지난 나들이에서 하루의 인연으로 어쩌다 오래오래 인연이 된 사람을 만났고, 오래도록 사랑한 누군가도 만났다. 


3년 전에 홀로 떠난 여행에서 길을 헤맬 때, 버스 번호를 알려주고 중심지까지 안내해 준 아이였다. 그때 메신저를 교환했고, 종종 안부를 묻고 연락을 주고받게 됐다. 그 하루의 인연이 이토록 큰 대접을 해줄 줄은 몰랐는데, 아주 큰 대접을 받았다. 식사도 모자라서, 나는 고작 좋아한다고 말한 과자만 준비해서 가져다줬는데, 이건 이렇게 해서 먹으면 맛있어요. 우리는 보통 이걸 어떻게 해서 먹는데, 좋아할 것 같아요. 하면서 그러나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는 선물을 잔뜩 담아서 주었다. 정말 생전 처음 보는 것들만 있어서,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고 골랐을 게 보여서 하나하나 고맙지 않은 선물이 없었다.

같이 마신 술이 무척 달았다. 처음 만난 그때 그는 클라리넷을 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졸업을 앞둔 간호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한국의 카페에 너무 가고 싶다고 그랬다. 귀엽고 맛있는 빵과 케이크를 잔뜩 먹고 싶다고 했다. 한국 남성들은 기념일마다 선물과 케이크와 꽃다발을 준비한다고 들었다며 그게 사실이냐고 묻길래, 내가 만난 남성들은 다 바보 아니면 등신이고 쪼다와 머저리라서 세 개를 다 받아본 적은 없다고 했다. 환상성을 부숴서 미안하지만, 그들을 다 합쳐야 겨우 꽃다발과 케이크와 기념일 선물이 된다고 했다. 굳이 남성에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다음에 만날 때 내가 케이크도 선물도 꽃다발도 다 들고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때는 내가 비싸게 대접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으며.




꽤 오랜 세월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그동안 만나지는 않았으므로 보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번 나들이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지만, 다시 보려니 떨렸다. 안 보자니 속상하고 만나자니 긴장됐다. 7년 전만 해도 내 기억에 그는 분명 약혼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멋진 싱글로 살고 있었다. 그 7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너 그때는 반지를 꼈었잖아’ 같은 말은 안 했다. 그때 내 귀로 똑똑히 약혼을 들었고, 그래서 그가 사주는 초밥은 맛이 없었고, 제법 속이 쓰렸다. 약혼자였던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저 사람이 사랑을 할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약지의 반지가 나에게 제법 큰 충격이었는데, 맨손으로 이렇게 만나니 반가웠다. 스테이크를 씹는 내내 즐거웠다. 후식으로 달달한 딸기 치즈 타르트까지 먹었다. 짧게 잘 정돈된 손톱이 보기 좋았다. 다정하고 진중하게 진심 어린 위로도 받았고 응원도 해주었다.

오래도록 나도 모르게 공들인 사람이었다. 어쩔 때는 과감하게, 어쩔 때는 어렴풋이 마음을 담아서. 다시 만나니, ‘아, 이 사람 내가 이래서 참 좋아했구나’ 싶은 지점이 있었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즐기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꽤 행복했다. 숨 쉴 때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웠고, 달이 지지 않는 하룻밤이 오늘이길 빌었다. 봄이 섞여 부는 바람을 맞는 게 좋았다. 같이 햇살을 쬐는 것도 좋았다. 스친 뒤에야 행복했구나라고 느낀 게 아니라 정말로 오랜만에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내 인간관계는 좁고 얕은 웅덩이의 연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마저도 좀처럼 내리지 않아서 쉽게 마르고 사라져 버리는.

언젠가 다정한 사람으로부터 ‘너는 정말로 사랑할 줄 아는 아이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네가 그렇게 사람이 싫다고 말하는 건, 사실 방어 기제야.
너는 사람을 사랑해.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는 지도 잘 알아.
그 다정한 마음을 헛되이 쓴 사람들이 멍청하고, 나쁜 거야.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조금도 다정하지 않겠다며 그렇게 다짐했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나는 또 누군가를 사랑하겠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길. 부디 나를 만나기 위해 나들이를 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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