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주스 사건의 전말

by 선홍


얼마 전 남편 때문에 무지 화가 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고작 자몽주스 하나 때문인데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기분 좋게 일어난 아침이었죠.

아침을 먹은 후 남편이 자몽주스를 가는 뒷모습과 소리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아주 평화롭죠? 부부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부부생활을 20여 년간 해보니 별거 없더라고요. 대신 별 걸 다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있었어요.


한 침대를 쓰냐 각방을 쓰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눈 뜨자마자 서로가 보이면 인사나누기, 이게 중요하더라고요.

그게 뭐 대수냐고요?


생각보다 쉽지 않던데요. 매일 지겹고 피곤한 일상 속에 서로의 존재를 계속 확인해 주는 것, 참 중요하지만 간과하기 쉬웠어요.


그날 제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도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남편의 주스갈기까지 갔던 일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튼 애들이 마실 주스를 정성껏 갈아 각자 방으로 배달까지 시켜준 남편이 뒤에 앉아 침을 삼키고 있는 자기 와이프는 보이지도 않는지, 바로 영업종료를 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게 뭐지? 하고 멍하니 남편을 보다가 왜 내 건 안 줘!라고 바로 뭐라 하기엔 너무 유치해 자존심 상하더란 말이죠.


허나 결혼생활동안 계속 '예술일기'를 써온 덕에 작은 불만일수록 가슴에 쌓아두면 큰 불이 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왜 내건 안주냐고 따졌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참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말이죠.

그랬더니 내가 뭔갈 먹고 있길래 안 줬답니다. 참 단순한 남편답습니다. 주스 한잔에 담긴 게 과일 덩어리 뿐입니까? 주스속 남편의 애정을 확인하고픈 여자의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다니.


해명이 어이없었지만 와닿든 말든 불만을 뱉고 나니 마음이 꼬이지 않습니다.

그날도 예술일기에다 남편흉을 봤거든요. 흐흐.


예술일기를 쓰면서 제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알게 됐습니다. 여전히 남편과 아옹다옹하지만 같은 일로 싸우는 일은 줄어들었습니다.


남에게 말하기 민망한 일일수록 예술일기에 써보세요. '빼빼로'처럼 마음이 비비 꼬이지 않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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