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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May 11. 2020

<11> 이제 너한테는 선톡 안할거다

찌질한 삐짐의 기록




 덴마크에 도착한 지 4달이 되어간다. 하나의 분기를 조금 웃도는 애매한 시간. 한국으로부터 8,071km 떨어진 곳에 있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하고, 뚝 끊기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물리적 거리와는 반대로 훨씬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중 '느슨해진 것', 그중에서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동시에, 찌질한 삐짐의 기록이다.


 최근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 라는 책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관계란 양측 모두 노력하기를 그만두면 시들어 죽어버리는 법이니까.


 흔한 말일 수도 있지만, 참이다. 관계란 한쪽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저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한 명의 친구가 떠올랐다. 몇 년간 자의든 타의든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같은 동네에 살았고, 덩달아 심리적인 거리 역시 꽤나 가까웠으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부터 내밀한 이야기까지 속속들이 공유했던 만큼 마음을 많이 쏟았던 친구였다. 그가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내 친구와 내 사이는 '시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와 연락하며 소소한 수다를 떠는 일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를 친구로서 많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고,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소원해질 사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덴마크에 도착하고 초반에는 여러모로 그립다는 칭얼거림이 섞인 연락, 조금 지나서는 이전처럼 시시한 농담이나 자주 노닥거리던 주제들로 연락을 했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보내진 연락들은 며칠이나 묵혀지곤 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한국에 가던 카톡들이, 이 친구에게만큼은 다른 속도로 가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무슨 이야기를 보냈었는지 까먹어갈 즈음 답장이 돌아왔다. 주말을 고르고 시차를 헤아려 걸었던 통화는 부재중으로 튕겨졌다. 익숙했던 것이 금방 생경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나 혼자 친했던 건가 싶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도착한 초반에 적응이 힘들단 핑계로 그의 안부를 신경 쓰지 않고 칭얼댔었나 싶어 대화창을 다시 올려 보기도 했다. 떠나기 직전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나 기억도 더듬어봤다. 딱히 소득은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걸려온 전화에서 친구는 너무 바빴고 그간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 왔다. '맞지, 얘 바쁜 애지' 하는 이해, 바쁜데 괜히 시답잖은 연락을 한 건가 싶어 미안함, 그리고 반가움에 조금 신도 났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연락들은 다시 묵혀졌다. 대화창을 올라가 봐야 이해가 가는 답장을 받는 것에 익숙해진 것은 세 달이 되었을 즈음이었고, 나 혼자 친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에게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본문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덴마크 화가 줄리어스 폴센의 <Adam og Eva>


 그즈음 저 문장을 마침 발견했다. 그 친구와 내 사이는 시들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절교해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닌, 단지 내 쪽에서의 '노력'을 그만두겠다는 다짐이었다. 노력이래 봤자 핸드폰 속 노란색 메시지들, 그리고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이유를 고민하는 일 두 개뿐이지만. 노란색 메시지들은 숙성을 거쳐 하얀색의 자잘한 마음의 상처가 되어 돌아왔고, 이유를 고민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 이상 나만의 애먼 추측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들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의미다. 8,071km를 날아오는 동안, 그 거리가 만들어낼 크고 작은 변화들에 대해 많은 생각과 걱정을 했었지만, 이 관계에 대한 걱정에는 근처도 가지 않았을 만큼 어떤 믿음이 있었다. 역시 인간관계는 어렵다. 이제 너한테는 선톡 안할거다. 아, 평생은 아니고 돌아가기 전 까지만. 돌아가면 넌지시 물어볼거다, 그렇게 바빴냐고. 평생이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이 '삐짐' 의 기록이 된 이유다. 평생 하지 않기에는, 아직까지 나는 그 친구를 많이 아끼고 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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