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로 떠나오기 전, 2년 남짓한 시간을 스타트업에서 보냈다. 20대의 경험들 중, 제일 집중적이고 효과적이고 멋진 성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딱 맞아떨어지는 답이 없음에도 우리만의 답을 찾아야만 하는 고민들을 치열하게 해야 했으며, 함께 했던 동료로부터 'Good 이 아닌, Best를 생각해내자'를 세뇌당하다시피 배웠다. 번아웃도 반년에 한 번씩 찾아왔었고, 동기부여나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꽤 헤매기도 했지만, 그런 아쉬움이 남을지언정 한 치의 후회는 없었던 2년이었다. 나는 이런 경험 후 자연스레 스타트업에 중독되었다. 그러던 와중 룸메이트가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TO가 있느냐 물었다. 회사가 인턴 영입에 무척이나 쿨하다는 답을 해왔다. 덴마크에서 스타트업 경험이라니, 내게 이보다 좋은 기회와 경험은 없겠다 싶어 곧바로 링크드인 프로필과 CV를 전달했다. 그들을 정말로 쿨하게 함께해도 좋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렇게 덴마크에서 남은 한 달은 스타트업 인턴으로 보내게 되었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개발자로 들어갔지만 막상 맡게 된 일은 마케팅 기획 쪽이었다. 내 이전 경력 혹은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보려는 대표의 빅픽처가 반영된 것 같았다. 개발자로서의 이력을 쌓지 못한 것은 아쉽기는 했지만, 참여할 때 '무슨 직무든 좋다, 스타트업이라면!'이라는 마인드였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유사 서비스와 경쟁사 자료조사, 어플에 탑재될 필터 기능 아이데이션, 콘텐츠 자료 수집 등이 주 업무였다. 콘텐츠 자료 수집의 경우는 하루 종일 코펜하겐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오는 꿀이 흐르는 업무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순탄했고, 어느 날은 만만치 않았다. 대체로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외국인이라면 체감상 만만치 않음이 곱절이었다.
대표는 영국에서 온 사람이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에 삐그덕거린다면, 그가 나를 배려하고 말고를 떠나 단연 나의 부족함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Sorry, what?' 하고 되묻는 날이면 어마 무시한 현타가 밀려왔다. 정중함의 정도 고려, 적확한 단어 선정, 업무 진행에 대한 의견 표현을 합쳐서 하려니 되던 영어도 안되기 시작했다. 일상 회화를 할 때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웃어넘기곤 했다면, 업무를 할 때는 Could / Can 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 내뱉지 않는다면 소소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다. 'Can you do it?' 이라는 물음에 'I think I can' 이라고 답하면 '어..음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뉘앙스로 들려 자신감 없어 보이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명확한 의사표현, 돌려 말하기 따위는 없는 언어가 영어라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는 기간이었다.
하루는 모든 팀원들과 점심을 먹는 날이었다. 대표는 말을 빨리하는 편이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랩 하듯이 냉소적인 영국식 농담을 던졌다. 나는 문맥을 고려해도 유머 코드를 알아듣지 못했고, 웃기지 않았기에 웃지 못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나는 별 반응 없이 대강 웃곤 햄버거에 집중하려 했다. 그때였다, '너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하며 굳이 물어왔다. 아니,라고 이야기하니까 이러이러한 뜻이었다고 설명하곤 다 함께 다시 와하하 웃었다. 그때부터였는가, 오피스에 가기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없던 영어 울렁증이 생긴 기분이었다. 퇴근하는 길에는 속상한 마음을 품고 영어 팟캐스트를 들었다.
이러한 소소한 이벤트 외에도 유창한 언어로 본인의 근무태만을 은폐하는 빌런 팀원이라던지, 대표가 나에게 다른 동료의 비난성 코멘트를 한다던지 와글와글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나는 이 경험을 하기로 한 것에 결코 후회가 없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어 울렁증으로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이로 인해 상한 자존심이 키워낸 독기로 영어 실력이 더 늘기도 했다. 이곳의 리더십은 이런 모양새로구나 관찰도 할 수 있었다.
어디서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지나치게 나태하지만 않는다면 참 좋은 주문이다. 그 또한 지나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