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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Jun 29. 2020

<17> 기회가 된다면 또 올게, 덴마크



고등학생 때 'Hoping for Denmark' 라는 글귀와 종이비행기를 끄적거려 자습실 책상 한편에 붙여놨었다. 덴마크가 어느 대륙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붙였던 낙서다.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별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과 동성애 결혼이 합법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그 낙서를 끄적였었다. 잘 사는 나라인 동시에,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나가는 행보를 보이는 나라라고 생각해서 환상이 생겼던 것 같다. 지금은 Whyrano 가 절로 튀어나오는 감성이긴 하지만.


10시가 돼서야 해가 지는 게 그리울 것이야.


그 낙서(이 글 하단에 첨부되어 있다)를 다시 꺼내보게 된 건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정한 뒤였다. 긴 휴학을 마친 뒤, 덴마크 교환학생을 지원했다. '그곳은...제 오랜 버킷리스트였습니다!' 혹은 '어릴 적 환상을 직접 확인해보러 가려고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예전부터 무의식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곳이라 자연스레 홀린 듯 선택했다는 것이 더 맞는 설명 같다. 있는지도 모를 만큼 미적지근하게 머릿속 위시 리스트 구석에 자리해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덴마크에 가면 꼭 뭘 해봐야지, 하는 이렇다 할 목표들도 없었다. 그래서 지인들이 '왜 덴마크야?' 라고 물어오면 '오래 살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영어가 엄청 잘 통하는 나라이기도 하구요.' 등으로 대강 대답하곤 했다.


그렇게 도착해서 정신없이 살아낸 첫 한 달은 오만과 건방을 깨부수는 좋은 기회였다. 첫 달이 힘들지 않았다면, 나는 내 부족한 점들에 대한 정확한 현실감각 대신 근거 없는 자신감을 채워놓고 뻗댔을지도 모른다. 사교성, 영어 실력, 난 쉬이 기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신감 같은 것들의 실체를 확인했다. 파티 같은 곳에서 주눅이 든 채 겉돌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을 내가 마냥 즐기지만은 못한다는 사실에 나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타인의 작은 말이나 행동에도 민감하게 파르르 예민해지고, 힘들었던 날이면 이불속에서 훌쩍거리며 이불을 차대는 등의 일들 모두 막상 지나고 나니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ㄱ..)


귀국 D-2 다녀온 호수. 속옷만 입고 입수했다. 좋았다!


본격적인 적응을 시작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가고, 새로운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는 오지게 힘들어도 나는 결국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적립할 수 있었다. 힘들어하던 나와, 어떻게든 극복해낸 나 모두 내가 잘 알기에 스스로를 향해 느끼는 기특한 감각이라 할 수 있겠다. 노트북을 깨 먹었지만 잘 수리해서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는 나, 배드 버그도 만났지만 그래도 매일 밤 잘 잤던 나, 조별 과제 빌런들 때문에 멘탈이 털렸지만 성적 잘 받은 나, 코로나가 터지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등했지만 남는다는 멋진 선택을 한 나 등등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잘 견뎌낸 나를 주섬주섬 그러모아 자신감을 얻었다. 적어도 다음에 오지게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이 또한 견뎌내리라 하며 의연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내 오만과 건방이 아주 산산이 깨 부숴 졌기 때문에, 오만하고 건방져지지 않을 만큼의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이 곳에서 만들어진 소중한 인연들을 비롯해, 계속해서 느껴온 크고 작은 깨달음들을 나열하라면 반나절이 걸릴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unlucky 한 교환학생 아니냐고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해주었지만, 코로나는 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영향도 내게 주지 못했다. 한치의 후회도 없었고, 경험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낙서를 다시 꺼내봤을 때 어휴 이게 무슨 감성이야 하며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그래도 이 곳에 와서 많은 것을 얻어가게 해 준 고마운 낙서다. 질리지 않고 주구장창 먹었던 Skyr도, 10시가 되어서야 마침내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라라랜드같은 보랏빛 석양도, 소란한 마음도 평화롭게 만드는 풍경들도, 아무튼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올게, 덴마크.


지금은 감당 안 되는 촉촉한 감성..Whyr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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