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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by 오제이 Mar 18. 2025


지난 주말 야근은 무척 늦게 끝났다. 밤 11시 30분 즈음에야 클라이언트의 완료 사인을 받았다. 집에 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엔 이미 늦어버린 시각. 우리는 할 수 없이 12시까지 기다렸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12시까지 기다리는 이유는 야근을 할 경우 자정을 넘어야 택시비를 지급하겠다는 회사의 규정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시각에는 택시가 별로 없다. 정말 택시가 없는 건지, 내가 가려는 곳에 안 가려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11시 30분에 택시가 더 많다고도 할 수 없다. 30분 차이로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심야에 택시 잡는 게 수월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택시 잡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스무 번이 넘는 시도 끝에 호출에 성공했다. 시계를 보니 12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총 세 명이었지만, 택시를 잡은 건 둘뿐이었다. 남은 한 명은 택시를 포기하고 조금 걸어가서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날이 춥고 비가 거세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린 심정도 이해가 갔다. 택시가 안 잡혀도 너무 안 잡히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나는 경량 우산을 들고나왔다. 비 소식이 있긴 했지만, 겨울비가 그렇게까지 많이 내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다. 비는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폭풍 같은 바람을 타고 내렸다. 우산이 뒤집히는 건 기본이었다. 우산을 썼음에도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폭삭 젖고 말았다. 빌딩에서 나와 택시를 타러 가는 그 짧은 순간에 말이다.



'일 끝내고 집에 가려다 하도 콜이 울려서 잡았어요.'


택시의 출발과 동시에 기사님이 말했다.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이 근처에 나 같은 사람이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중에서 간택을 받은 것이었다. 내가 정말 행운아라고 느껴졌다. 그런 생각에 나는 어떻게든 기사님께 보답하고 싶어졌고, 무엇이라도 도움 될만한 일을 하겠다 마음먹었다.


물론 그 시간대에 택시에 탄 사람이라면 취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눈을 감고 편히 쉬며 가고 싶을 거다. 뒷좌석 시트에 사장님처럼 늘어지게 기대어 앉아 도로 노면과 타이어가 만들어내는 마치 ASMR 같은 선율 들으며 가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땅히 내가 누릴 수 있는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기사님의 말동무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기사님은 졸음을 쫓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습관에서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연신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차마 그 말을 끊고 '저 조금만 쉬면서 갈게요'라고 할 수 없었다.



30분 남짓한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나는 기사님의 인생에 대해 퍽 자세히 알게 됐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두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데 최근 한 명이 군대를 다녀왔고 공군에서 복무한 터라, 한 달마다 집에 오는 통에 곤란했다는 이야기. 코로나 때 외식 사업을 접고 비트코인에 투자해 4억 가까이 벌었지만, 욕심이 과해져 돈까지 빌려 가며 투자했고 기어이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땅까지 팔아가며 공격적으로 투자하다 결국 빚만 남은 채 눈물의 손절을 했다는 이야기. 최근 트럼프 발 대북 관련 주로 재미를 쏠쏠히 보고 있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기사님이 말씀하신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내 인생과는 하등 교차점이 없는 아무 말 대잔치와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을 허투루 듣고 흘리지 않았다. 예로부터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는 둘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배울만한 게 있었다.


나는 기사님의 말을 들으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첫째는 나의 아버지였다. '혹시 우리 아버지도 어디 가시면 이렇게 자기 삶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나에 대한 사연도 담겨 있을까?' 말 주변이 별로 없으신 아버지가 생판 남에게 어떤 말을 하고 다니시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떠오른 생각은 인생에 요행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행운이란 것은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와 품 안에 쏙 하고 안기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내게 택시를 잡는 행운이 밀려왔으니까. 그러나 그 요행만 믿고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일이든 대가가 따르는 법이거늘, 일하지 않고 쉽게 얻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집 앞에 도착해 택시에 내리니 빗발이 꽤 가늘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현관 센서 등이 켜지기도 전에 나를 반기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와~ 고생했어!' 그 말 한마디에 피로가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처럼 행운은, 아니 행복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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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abovethesur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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