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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에 함박눈

by 오제이


여태껏 3월 말에 눈이 왔던 기억이 있나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이렇게나 함박눈이 내리다니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주말 아침, 여느 날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모닝 루틴을 시작했다. 맨손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준 뒤, 가볍게 근육 운동을 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하지만 활발하게 몸을 움직였다. 등이 약간 젖을 정도로 땀이 나며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왠지 하루가 활기차게 돌아갈 것만 같았다.


운동을 마치고 찬물 샤워로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적당히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었다. 방 안 온도가 평소보다 차가워 제법 두툼한 옷을 입었다. 얼마 전 겨울옷을 정리하며 몇 벌 남겨둔 두꺼운 옷들이 고마웠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붓고 전원을 올리고, 얼마 전 다이소에서 사 온 원두를 핸드 그라인더에 넣어 갈았다. 비싸고 좋은 원두는 아니지만, 부담 없고 부드러운 제법 괜찮은 원두다. 물이 끓는 동안 보온 컵과 드리퍼, 필터를 결합했다. 그리고 잘게 분쇄한 원두를 필터 위에 쏟아내고 드립 커피를 내렸다.


나의 드립은 일명 야매 드립이다. 원두를 적당히 적셔 뜸을 들인 후, 나머지 물을 한 번에 흘려보내 추출하는 방식이다. 이전에는 물과 온도 조절을 섬세하게 하며 나름대로 전문가 흉내를 내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리나 아무렇게나 내리나 나의 코와 혀로는 향의 우월을 가리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적당히 추출해도 내 입맛엔 다 맛있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일 아침 핸드 드립을 내리며 얻은 결론이다.


350ml 스탠리 머그컵에 넘칠 듯 커피를 담았다. 조금 덜 담으면 될 일이지만, 매번 넘칠 듯 많이 담는 건 내 욕심 탓이다. 표면 장력을 이용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노라 마음먹으며 조심스레 움직이는 모습이 퍽 진지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정말 한 방울도 넘치지 않고 책상까지 도달했을 때의 짜릿함이란.



오늘은 아내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근교로 드라이브를 떠나 맛있는 감자탕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모닝 루틴을 서둘렀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일기와 주간 계획, 글쓰기를 마쳤다.


10시가 되니 아내가 눈을 비비며 나온다. 지난밤 찾아 놓은 맛집 리스트를 하나씩 설명하며 내게 골라보라고 말했다. 나는 가장 깔끔해 보이고 주차 자리가 넉넉한 곳을 선택했다. 내가 인터넷으로 식당을 고르는 기준은 심플하다. 깨끗해 보이는 집 우선이다.


아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케이 구글, 오늘 날씨 어때?" 아내가 습관처럼 외쳤다. 그런데 구글 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현재 서울의 기온은 영하 3도, 산발적인 소낙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에? 말도 안 돼' 아내는 거실 창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 창밖에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얗고 커다란 눈발이 회오리치듯 아파트 주변에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마법 주문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이 날씨에 나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대신 이왕 이렇게 된 거, 배달 음식을 주문해 따뜻한 점심을 즐기기로 했다. 배달 앱을 열어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는 감자탕 집에 주문을 넣었다. 주문을 넣자마자 울리는 픽업 알람.


'오늘따라 속전속결인걸? 그나저나 이런 눈발을 뚫고 배달 오기 참 힘들겠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창을 열어 바깥 날씨를 살폈다. 그런데 맙소사. 아파트 주차장에는 눈이 그치고 햇볕이 쨍하게 비추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노면에서 올라오는 흙먼지 냄새는 마치 봄비가 내린 것처럼 기분 좋은 내음을 풍겼다.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조금 전만 해도 분명 눈이 내렸는데...'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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