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아이들

프롤로그

by 이미사

흙을 질척이며 만지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기 시작한다.


하나는 “나도 저렇게 놀던 아이였지. 참 재미있겠다”라고 말하는 어린 시절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돼”라고 경계하는 어른의 목소리다.


어린 시절의 부름이 들려올 때면, 너무도 편안하고 즐거웠던 기억의 한 조각이 되살아난다. 비가 내리면 금세 흙탕물이 되던 집 앞 놀이터. 그곳에서 친구들과 물을 튀기며 신나게 뛰놀던 나의 모습. 비 냄새와 흙냄새, 풀냄새가 뒤섞인 그 기억은 지금도 나를 그때로 불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선생으로서의 내가 고개를 든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책임이 내 안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 두 목소리 사이를 서성이며, 그 틈을 따라 도예와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도예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을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들려오던 두 목소리는 사실 내 안에서 작업을 대하는 태도의 대립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흙을 만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했다.

이 흙은 꼭 도자기가 되어야 할까.


나에게 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완전해 보였다. 그럼에도 작품을 감상하거나 작업할 때면, 흙의 질감과 유연성이 살아 있는 작업에 마음이 끌렸다. 그런 작품들은 오래된 흔적처럼 느껴졌고, 인간이 자연으로 드러나는 순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결국 ‘흙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손’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작업을 이어가며 흙이 마르지 않도록 관리하던 어느 날, 작품 위에 아주 작은 초록빛 싹이 돋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을 만큼 미세했지만, 그 모습은 매우 신기했다. 마치 우담바라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예 흙은 일반 흙보다 훨씬 정제된 재료이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러나 결국 흙은 흙이었지만 하필 손과 흙이라니. 나는 그 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만든 작품보다 생명을 틔운 이 흙이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의 나는 흙을 하나의 자연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 앞에서 나는 늘 조심스러웠고, 경외심이 커질수록 작업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다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도예를 배우고 싶어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엄마에게 컵을 선물하고 싶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막상 흙을 손에 쥐자 아이들의 모습은 사뭇 달라졌다. 목적은 금세 잊힌 듯했고, 아이들은 흙 그 자체에 몰두했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가르쳐야 할까. 가르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안의 갈등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마음 앞에서 늘 외줄 타기를 했다.

학창 시절 내가 가졌던 고민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멈칫거리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가만히 머무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 내 앞에 놓였던 흙도,

지금 아이들 앞에 놓인 것도 다르지 않은 흙이었다.


그리고 그때 놀이터에 놀던 아이도, 지금 아이들도 흙 앞에선 같은 아이일 뿐이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어서 이렇게 오래 머뭇거리고 있을까.


아니,

나는 내 안에서 무엇을 꺼내고 싶었을까.


처음엔 아이들을 위해서 시작된 질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를 잃지 않으려고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도예를 알기 전부터, 아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다만 흙을 만지며 그 질문이 더 또렷해졌을 뿐이다.


나에게 흙은 말랑할 때 가장 솔직해 보였다. 손이 닿는 대로 반응하고, 힘을 주면 그만큼만 달라졌다. 나는 오래도록 그 상태를 좋아했다. 굳지 않은 채로,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시간을.


그 시간을 한동안 나는 아이들과 이렇게 보냈다.


본능적인 즐거움을 어떻게 작업 안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지금이라서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을 어떻게 작업으로 남길 수 있을까.


아이들은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니 끝없이 말랑하게 두는 것도 책임은 아닐 것이다.


흙은 단단해져야 쓰일 수 있다. 불을 지나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나도, 지금보단 단단해져야 한다.


아이들은 결국 묻는다.


“이거 언제 구워요?”


나는 아이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고 싶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불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내겐 기준이 있다.

제대로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매번 같은 자리에 선다.


어디까지가 지켜보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손을 내미는 것일까.


이 글은 흙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도예를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흙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굳지 않은 상태를 오래 바라보는 일. 쉽게 단정하지 않는 일. 어쩌면 나는 흙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질문을 붙들고 서 있다.
그리고 지나 보니, 그것이 내 삶을 건너게 하는 밧줄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26년 2월 나의 작업실에서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