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술을 마시는 할아버지는 봤어도 할머니는 처음이네. 미희 이모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모의 말을 받아쳤다. 이젠 눈이 나빠 뭘 읽을 수가 없어. 드라마는 밤에 하고, 그러니 낮엔 낮술이나 하는 거지. 다른 할머니가 덧붙여서 말했다. 영감들은 다 죽고, 자식들은 다 떠났으니, 이젠 밥도 안 해도 되거든. 그러니 낮술이나 하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미희 이모는 왠지 할머니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두부 한 모를 샀다. 할머니, 안주 드시면서 마시세요. 그날 평상에서 낮술을 마시던 할머니들이 미희 이모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미희 이모는 막걸리 네 잔을 마시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벤치에 앉아 남학생들이 축구하는 걸 구경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같은 과 동기들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 시간짜리 전공과목을 빠졌을 뿐인데 아주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고 이모는 엄마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괜찮은 애인 걸 왜 고등학교 때는 몰랐지?
윤성희 <낮술>
문득 낮술에 관한 불편한 기억이 떠오른다.
큰딸 초1 때 반 친구 엄마들의 모임이 있었다. 초보엄마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작은 정보라도 얻을까 싶어 그 모임을 기어이 이어갔다. 그때부터 오랜 기간 모임을 이어왔다. 그 모임을 빠져나온 건 아이가 취직을 하던 해였다. 아니 그 이전부터 빠져나갈 기회를 노렸지만 쉬 결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쌓아온 인간적인 정이 아쉽기도 했다. 수없는 갈등 끝에 내린 결정의 계기는 낮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였고, 모일 때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수순으로 이어졌지만 대부분 식사 자리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처음엔 소주 한두 잔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더 소주병 내지 맥주병이 늘어났다. 식대보다 술값이 더 많이 나올 지경까지 이르러서 나는 그 모임을 빠져나왔다. 술병이 늘어난 것이 이유가 아니라 술주정이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술잔이 오가고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면 남편 흉보는 것부터 시작됐다. 레퍼토리는 늘 비슷한 수순으로 연결되다 투닥투닥 갈등이 이어졌다. 평소 느꼈던 자격지심이었던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가기도 했고, 괜한 말로 시비를 걸어 분위기를 망쳤다. 상대의 상처를 건들며 희열을 느끼는 것인지, 묘한 감정의 연결고리는 팽팽하게 유지됐다. 술을 먹지 않는 나는 그런 분위기를 감내하기가 버거웠다.
이 소설을 읽고, 그들을 떠올렸다. 살짝 미안하기도 했다. 낮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구나! 저녁에 마실 수 없으니 낮술이라도 아니 낮술로 위로를 얻고 싶었던 마음의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겠다. 아님 그저 하루 한 날 일탈을 즐기고 꿈꾸고 잊고 싶은 기억들을 술기운을 빌려 내치고 싶었을 수도. 저녁이 되기 전 낮술 한 판으로 그 하루의 일탈로 나를 잊는. 아니면 세 시간짜리 전공수업을 빠지고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는 말처럼 그 하루 취함으로 정신적인 긴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저 흥이었을 수도. 그러했을 뿐인데, 나는 너무 단적으로 방향을 틀어 나쁘게만 보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인지. 30대, 그러니까 36세에 만나 54세에 빠져나왔으니,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한 생의 격정적 순간이었을. 젊음이 성성했던, 일터와 육아를 병행하며 그 힘겨움을 희석하려 그들을 공유했던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3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나의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서 희로애락의 접점을 공유했던 시간이었고, 공유한 사람이었을 그들.
바르고 곧은 시간만이 옳은 것은 아닐진대 삐뚤어진 그 경계를 나는 견딜 수 없었던 거다. 그들의 행위를 흑과 백으로 단정 짓는 것이 위험한 것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그들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을 수도. 문득 드는 생각, 윤성희의 <낮술>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구도와 수평이 맞지 않는 사진이면 뭐 어때. 때로 삐뚤어지면 뭐 어때. 인생이란 무늬도 되었다가 얼룩도 되었다가 하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