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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Jul 20. 2021

조율

이런 날에는 이런 향기

조율

매번 이게 문제다.

처음 시도했던 건 기타였다. 줄이 있는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다.

악기와 악보, 온라인 클래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줄이 있는 악기는 먼저 '조율'을 해야 한다는 걸.


'자동으로 조율이 되는 기타는 없는 걸까?'


그게 뭐라고, 조율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내일부터 하자~'

그리고 그 내일이 되면 또 '내일부터 하자~'

결국 '조율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한 나는 기타 배우기를 포기했다. 나의 기타는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눈에서 사라지면 기억도 금세 사라진다는 건 진리일까?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악기를 덜컥 사버렸다. 이번에는 가야금이었다.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어 취미로 하는 것 치고는 엄청난 액수를 지불하고 가야금을 주문했다.

이번에도 완벽했다.

악기와 악보, 온라인 클래스.

그러나!!!

가야금도 줄이 있는 악기였다. 이 악기의 시작도 '조율'이었다.

금액의 문제였을까? 기타의 가격이 그만둬도 될 만큼 가벼웠던 것일까? 망설이긴 했다. 가야금 역시 온라인 클래스를 플레이했다가 멈추고, 플레이했다가 멈추고, 시간이 꽤 흘러서야 조율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조율만 하는데도 벅찼다. 연주를 본격적으로 배우기도 전에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겼다. 음 하나 맞추는데도 나의 인내심은 바닥을 쳤다. 결국 조율 앱에서 그 음이 정확한 음이 아니라는데도 대충 비슷하게 소리를 맞춰놓고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25현 가야금, 25개의 음을 모두 정확하게 맞추는 게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었다.


가야금 주법을 하나하나 배울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음정이 약간 어긋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한 줄 한 줄 기법만 정확하게 익히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곡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엉망으로 조율이 된 가야금에서는 야릇하게 이상한 소리가 났다. 멜로디가 맞긴 맞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이상함에는 약간의 거슬림도 섞여있었다.

 

'조율을 제대로 해야 되겠는 걸!'


조율 앱을 켰다. 조율하는데 하루를 다 써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며 가장 낮은 음자리 '미'부터 시작했다.

이상했다. 첫 클래스에서 조율을 배울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음정이 정확하게 맞혀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쉬웠다.


이게 뭐지?


25현, 25음, 모든 음을 정확하게 조율하는데 몇 분도 안 걸렸다.

익숙해지면 조율도 더 잘 되는 것일까?

조율이 잘 된 가야금이 내는 소리는 아름다웠다. 아직은 서투른 손이 연주하는 곡도 좋았다. 욕심이 생기게 하는 소리였다.


이 정도 소리라면 연습할 맛이 나지! 정말 멋진 곡을 연주하고 싶어!!


함정이 있었다.

줄로 된 악기는 한번 조율해놓으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았다. 매일 가야금을 시작하는 순간, 딱 한번 제대로 조율해 놓으면 그날 하루는 언제든 가야금을 뜯을 때마다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이 되면 음정은 어김없이 어긋났다. 다시 조율을 해야 했다. 조율하는 시간이 짧아졌다고 조율하는 일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조율'은 귀찮은 일이었다. 소리가 조금 이상해도 그냥 가야금 연습을 하는 날이 늘었다. 오늘도 가야금 소리가 이상했다. 조율을 해야 할 상태였다.


가야금은 뜯고 싶은데 조율은 하기 싫어!


진짜 이상해서 못 들어줄 지경인 현 몇 개만 조율을 하고 가야금을 다시 뜯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급한 성격이 드러나는 걸까?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척'하지만 사실 나는 원하는 결과가 원하는 바로 그 순간 내 앞에 딱 나타나길 바란다. 이 마음이 너무 유아적인 것 같아 숨기려고 애쓸 뿐.

급한 마음이 가져다준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금만 속도를 늦췄더라면, 잠깐이라도 멈췄더라면 보지 않았을 손해를 혹은 하지 않았을 후회를 그렇게 자주 반복하면서도 급한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워워~ 천천히 천천히'

'싫어! 답답해!! 지금 당장!!!'


'조율'은 아무래도 완벽하게 '과정' 그 자체인 것 같다. 누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 긴 서론은 필요 없고 나는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다. 이러니 '조율'이라는 행위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귀찮고, 귀찮고, 귀찮은 조율,

하지만 가야금을 계속 배우려면 나는 매일 조율을 해야 한다.

어쩌지?

가야금을 당근 마켓에 내놓거나 그 루틴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조율은 싫지만 가야금은 좋아. 당근 마켓에 내놓지는 못하겠어. 그러면 '조율'이라는 행위에서 의미를 찾아보자.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조율이라는 행위를 매일 반복하는 게 꽤 가치 있는 일이라고 내가 나를 믿게 만들면 되잖아?


'조율'이라는 행위가 지닌 가치는 무엇일까?

'조율'이라는 것을 루틴으로 삼는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다 보면 가야금 말고 내 일상에도 이 행위가 조금은 스며들지 않을까? 꽤 긴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 내 일상의 곳곳에 '조율'이라는 행위가 스며든다면 그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멀쩡한 것 같지만 야릇하게 이상한 구석들이 있는 일상, 묘하게 어긋난 음정들을 조율한다면 야릇한 이상함이 아름다움으로 변할 수 있을까?

오! 이거 괜찮은 데.


급한 성격, 내 몸에 밴 습성의 저항, 이 저항을 달래줄 블렌딩을 해야겠어.

레몬과 로즈우드!

레몬은 격앙된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오일이다. 내 안에 급하게 타오르는 불길, 나를 급하게 몰아치는 건 격앙된 감정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준비? 그런 거 귀찮아. 일단 고!'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내 마음에 레몬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로즈우드.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를 만든 제니퍼 제퍼리와 카렌 오스본은 로즈우드 에센셜 오일의 키워드가 '수용'이라고 말한다. 일단 뱉어내지 않고 삼키기로 결정했으면 잘 소화시켜서 내보내 보라고 말해주는 게 로즈우드다.

"힘들게 삼켜놓고 못 참겠다고 그 아까운 걸 설사로 다 내보내 버릴 거야? 기다려봐. 충분히 소화가 되어서 황금 같은 똥이 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봐."


마사지 오일을 만든다. 3% 농도로 블렌딩을 한다.

베이스 오일로 호호바 오일 50ml를 소독한 유리병에 담고, 거기에

레몬 에센셜 오일 15방울,

로즈우드 에센셜 오일 15방울.

은은한 꽃내음을 배에 바른다. 천장을 보고 소파에 누운 채 마사지 오일 듬뿍 바른 배를 꾹꾹 마사지해준다.


레몬과 로즈우드의 도움으로 '조율'이라는 행위를 뱉어내지도 않고, 설사로 다 쏟아내지도 않으려고 한다. 최대한 내 안에서 그 행위가 황금 같은 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기다려보려고 한다.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향기가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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