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내 마음을 이리도 부산하게 만드는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아이가 나를 찾는 걸까?
스타차일드 바틀에 담긴 블루와 핑크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한다. 아이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의 내면에 살고 있는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면 아이에게는 내가 아빠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여성성과 남성성이 그 아이의 엄마이고 아빠이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어떤 삶의 형태를 살고 있든 당신은 한 아이의 아빠이자 엄마이다. 당신의 내면이라는 가족 안에서. 어쩌면 당신의 내면 아이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도 내 안에 여러 명의 아이가 살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눈을 감은 채 어떤 아이인지 불러본다.
"누구니?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부산한 거니?"
꿈속에서 나는 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를 데리고 있다. 밖에서 노는데 아이가 쉬가 마렵다며 보챈다.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는데 그새 옷에 오줌을 싸버렸다. 눈물을 잔뜩 머금은 아이의 눈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나온다. 아이를 달래며 이 참에 샤워나 하자고 말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아이의 옷을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다. 이 조그만 애가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껴입고 있는 건지!
드디어 맨살이 드러났다. 화장실 한편에 아이가 벗은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물장난을 치듯 신나게 샤워를 한 아이는 기분 좋게 새 옷을 입고 씩 웃는다.
올해 1월에 꾼 꿈이었다.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뒤덮기 전 겨울이었다.
이 아이는 나의 상처 받은 내면 아이였을까? 아니면 4~5년 전 새로 생겨난 내면의 무엇이었을까?
후자인 것 같다. 4~5년 전에 나의 내면에 새로 태어난 아이!
4년 전이었을까, 5년 전이었을까, 그때 나는 내 생애 첫 번째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나를 우울증이라는 웅덩이에서 꺼낸 건 의사도 약도 아니었다. 단풍잎이었다!
출근길 놀이터 옆 길을 지나고 있었다. 돌덩이 같은 다리를 한발 한발 억지로 떼다가 우연히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잎이 너무 아름다웠다.
'와! 정말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올라온 말, 이 말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너 뭐냐? 겨우 이거였어? 이거면 되는 거였어?'
그래 정말 겨우 그거였다. 그거면 되는 것이었다. 너무 시시하지만 그랬다.
그 순간 이 꿈속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그럴듯하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저렇게 장난기 가득한 사랑스러운 아이라면 정말 단풍잎 하나로 나를 구해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뭘 그렇게 잔뜩 입혀놓았을까?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 벗겨내고 씻겨주니 이렇게 후련한 걸, 아이도 이렇게 좋아하는 걸.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웅덩이에 한번 빠져보니 다시는 빠지기 싫었다.
나를 구해준 아이에게도 웅덩이에 빠지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빠지면 얼른 나올 수 있게 멋진 구명복을 입혀주고 싶었다.
"이것 좀 입어봐, 이것도 입어봐, 여기 더 좋은 게 있다. 이것도 입자."
아이가 옷 속에 파묻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옷을 입혀놓고서도 계속 불안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이 꼬마가 또 살려준다.
"쉬 마려워요~"
내가 입힌 옷을 내가 벗겨준다.
그게 올해 1월이었다.
내면 아이는 무조건 내가 도와줘야 하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이 꼬마를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아이 덕분에 내가 살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