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소마의 이퀼리브리엄 바틀은 내 마음의 상태를 알아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내가 가진 빛의 스위치를 켜도록 도와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4개의 바틀을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컬러를 통해 마음을 살핀 후 보통은 두 번째 바틀로 작업을 시작한다. 두 번째 바틀로 먼저 작업을 하는 건 그 바틀이 Gift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Gift는 선물이자 천부적 재능을 뜻한다. 두 번째 바틀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재능으로서 Gift이자 그 선물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이다. Mike Booth에 따르면 두 번째 바틀은 '선물' 혹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받으려면 무엇을 거쳐야 하는지 보여주는 바틀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선물상자를 열기 위해 투명한 클리어 빛과 핑크가 함께 담긴 11번 바틀 뚜껑을 열어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사랑, 그중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는 핑크와 거기에 빛을 더해주는 클리어 빛깔, 이들이 열어줄 선물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11번 바틀로 작업을 시작한 김에 아침 명상도 이 바틀로 했다. 핑크 음악이 흐르자 내 입에서 '할머니'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할머니를 부르자 2년 전 꿈이 다시 되살아났다.
꿈속에서 나는 유혈이 낭자한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이 도끼로 서로 죽이는 게임을 하는 방이었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도끼를 간신히 피해 다시 방에서 나왔다. 사람들의 울음소리, 신음소리로 정신이 없다. 의무실이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이곳의 책임자다. 간호사 한 명이 다쳐서 들어온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 할머니가 그 간호사를 부른다. 간호사가 어딘가로 가더니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와서 나에게 준다. 상자 안에는 전구가 하나 가득 들어있다.
나 "할머니, 저는 아직 전구가 필요 없어요."
할머니 "곧 필요할 테니 받거라."
나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할머니 "다 네가 쓸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꿈. 마침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꾼 꿈이라 더 그렇다.
2년 전 그때는 어떤 변화가 나를 찾아올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공황장애가 나를 덮칠 것이라는 것도, 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될 것이라는 것도, 오라소마라는 걸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할머니 꿈을 꾸고 나서 '새로 이사 온 이 땅이 참 특별한 곳이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도대체 그 많은 전구를 어디에 쓰게 될지.
꿈이 처음 시작된 곳은 아주 끔찍한 방이다. 남자들이 잔뜩 모여서 도끼로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하는 곳. 나도 그 방에서는 남자였다. 여자인 내가 꿈에서 남자로 등장할 때, 그것은 내가 아니무스에 포획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내 내면의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내 의식을 잠식한 상태. 여성이 아니무스에 포획되면 가슴과 머리의 소통이 끊긴다. 아니무스는 '의견'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억지 의견. 가슴의 말이 배제된 머리의 지껄임.
[아니무스는 마치 교부의 집회나 그 밖의 권위자들의 모임과 같은 것으로 설교 단상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성적'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까다로운 판단은 주로 말과 의견들인데 이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주워 모아서 평균적 진리, 정당성, 그리고 합리성의 전범으로 압축한 것, 즉 많은 전제를 모아놓은 일종의 사서로서 언제나 의식적이고 능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 즉시 의견을 가지고 거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어떤 때는 소위 건강한 인간 이성의 형태로 나타나며, 어떤 때는 편협한 편견의 형태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교육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많은 원칙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늘 그래 왔어" 혹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아. 그런 이렇고 이래"라는 등.
(...) 아니무스 의견은 항상 집단적이며 개인과 개인적 판단을 간과한다.] 융 기본 저작집 3, <인격과 전이>
나도 저런 말들을 참 많이 했다. 특히 싸울 때.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봐라. 뭐라 그러나", "누가 당신처럼 그래? 보통 사람들은 안 그래"
내가 무의식적으로 주워 담은 평균적인 진리, 정당성, 합리성의 기준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지 의견일 뿐인 것들.
쌈닭 같은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병원, 대학원, 직장이 된 학교, 그리고 내가 만든 가족 안에서 수많은 싸움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 싸움의 상대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싸움의 상대가 그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이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타인에게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내 삶에, 그 삶을 만든 나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도끼로 찍어서 죽이는 게임, 나는 내면의 수많은 나를 도끼로 찍고 있었던가? 무의식적으로 주워 담은 평균과 기준에 맞춰지지 않는 수많은 나를 무참히 찍어내리고 있었던가?
그 방에서 나와 의무실로 들어가자 나는 다시 여자가 된다. 치유의 공간, 그곳은 나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는 곳일 테지. 다행히 나는 도끼를 맞지 않아서 상처가 없었다. 아무런 처치도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나에게 처방해준 것, 커다란 나무 상자에 가득 든 전구들.
"너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이 만큼 많은 빛이 필요하단다."
할머니는 사실 이 말을 해주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주신 상자를 받아서 내가 제일 먼저 간 곳은 깊고 깊은 심연이었다. 우울과 공황장애가 나를 데리고 간 깊고 깊은 어둠. 그 어둠 안에서 나에게 전구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밖을 향하던 나의 말과 의견들이 잠잠해지자 아니무스의 말은 내면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 말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아니무스를 따라 점점 더 깊이 내려가자 전구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깊은 심연, 전구 하나가 켜지자 나와 닮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는 게 보였다. 나였다. 어느 시절의 나. 전구가 하나씩 켜질 때마다 그 어둠 속에는 어떤 시절의 내가 한 명씩 있었다. 그렇게 전구가 하나씩 하나씩 켜지면서 나는 다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칼 G. 융은 아니무스의 말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갈 때 '영감을 주는 여성 femme inspiratrice'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무스의 말이 밖으로만 향하면 '아니무스 사냥개 animus hound'가 된다고도 말한다.
꿈이 보여준 나의 모습, 도끼를 들고 유혈이 낭자한 방에서 그 게임에 동참하는 남자가 바로 아니무스 사냥개가 아니었을까? 다행이다. 그 방을 나와서 의무실로 들어가서.
할머니가 선물해주신 나무 상자, 그 속에 가득 든 전구를 나는 지금도 하나씩 하나씩 켜 나가는 중인 것 같다. 무의식의 계단을 다시 올라와 이제 의식의 문턱 어딘가에 다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하는 오라소마의 11번 바틀이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부르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