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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09. 2021

가장 오래된 선물

 가장 오래된 선물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라서 휴일이니 해마다 어린이날을 핑계로 우리도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며 마침 주말이었던 5월 4일을 결혼식 날짜로 정했다. 그의 말대로 평소엔 야근도 많이 하고 토요일에나 일요일에도 회사에 가는 날이 많았지만 5월 5일에는 매번 휴일로 보냈다. 덕분에 5월 4일 저녁엔 외식을 하고 어린이날에는 어디론가 여행을 갔다. 하지만 남편은 선물이나 꽃다발 같은 걸 준비하지 않는 묵뚝뚝한 사람이었다. 그 흔한 카드 한 장 받아 본 일이 없다. 연애할 때 성탄절 카드 한 장 받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반면 나는 매번 기념일이나 생일날이면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한동안 남편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는데 거의 2년 넘도록 도시락 편지를 쓰기도 했고 와이셔츠를 다림질 한 후 한 쪽 주머니에 달콤한 메시지를 적은 쪽지를 넣어 두기도 했다. 남편의 회사로 생일 선물을 보낸 적도 있다. 한번은 생일 선물 할 만한 것을 못 찾아서 깜짝 이벤트를 해 주기도 했다. 남편 생일은 1월이고 성탄절에도 이미 선물을 했기 때문에 생일선물 할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하는 나에게 직장동료인 세 살 위 언니가 좋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세상 남자들은 모두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니, 실크로 된 예쁘고 야시시한 속옷을 사 입고 분위기를 잡아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그날 바로 비둘기 색깔의 몽환적인 분이기가 나는 슬립을 샀다.  

 
늦게 퇴근한 남편이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 무렵 주방으로 불러냈다. 식탁위에는 촛불을 밝혀 두었고 와인도 준비해 놨다. 나는 얼른 슬립으로 갈아입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두 손을 모으고 방에서 나와 남편에게 다가갔다. 순간 남편은 깜짝 놀라며 "밖에 영하 10도도 넘는데 감기 걸리겠다. 얼른 옷 입고 나와!"하는 것이다. 정말 쨍그랑 쨍그랑 하는 구세군 종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남편이지만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그 슬립은 십 년이 넘도록 서랍 안에 잠들어 있다가 살이 쪄서 더 이상 맞지 않다는 걸 확인한 어느 날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기념일이나 생일날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평생 빠질 김이 한 번에 왕창 다 빠져버려서 더 이상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때때로 내 생일이 무심하게 지나고 나면 조금은 아쉽고 쓸쓸했다. 해외에 나와 살면서 부터는 5월 5일이 휴일도 아니기 때문에 그나마 하던 결혼 기념 축하도 뜸해지고 남편 생일도, 내 생일도 소리 없이 지나치곤 했다. 더구나 5월은 여행 성수기가 막 시작되는 시기라서 내가 여행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공항에서 또는 여행지에서 손님들과 보내는 날이 많아졌으니 둘이 함께 우리의 기념일을 자축하자던 처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5월 4일이 휴일이었고 나도 여행손님이 없어서 함께 지방 여행을 가게 되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둘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인지 호텔에 들어서니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여행지는 슬라이고 근처의 아담한 호텔이었다. 호텔 식당에서는 아로(Arrow)호수와 적막할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호텔 뒤로는 소나무, 전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이 있었는데 이곳을 여행지로 정한 이유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솔길'을 걷기 위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솔길이라는 이름은 남편이 정한 것인데 그 이름이 너무 가벼울 정도로 신비로운 길이었다. 날씬한 나무들이 곧게 뻗어 하늘로 솟아 있고, 미처 태양 볕을 만나지 못하는 아랫 가지들은 회색빛을 띄며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한 숲이 만든 길은 아늑하고 비밀스러웠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어두움이 은밀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처음 경험한 아름다운 공포였다. 좁은 길 사이로 놓인 나무 바닥에서는 한 걸음 내 디딜 때 마다 벌어진 틈새를 맞춰가는 뿌드득 소리가 났다. 길을 잃는 사람도 있었던지 나무에는 눈높이로 하얀색 화살표가 삐뚤하게 그려져 있었다. 계절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음에도 바닥에는 나뭇가지와 낙엽이 수북하였고 하얀 눈을 맞은 듯이 나무는 희끗희끗한 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 갈수록 녹색을 싱싱하게 띄는 나무는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건지, 나무 한 그루에 삼 대, 사 대가 함께 사는 것 처럼 보였다. 밑둥은 아버지, 아랫부분은 할아버지, 그 위에는 청년이 되는 아들과 개구쟁이 동생까지 한 곳에 뿌리를 두고 서 있는 것처럼. 한 참을 걸었다. 남편은 이미 이곳에 서너 번을 왔었다. 그리고 몇 번을 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데려가고 싶어 했었는데 가히 선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예쁜 길이었다.  

 
남편은 사실 진짜 선물은 이 길 저 끝에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한 참을 걸어 나오니 숲이 끝나고 뻥 뚫린 잔디 벌판이 나왔다. 밤에서 낮으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온 것 같았다. 벌판에는 삼천년 넘은 고인돌이 서 있었다. 라비(Rabby)라는 이름의 고인돌은 70톤이나 되는 머릿돌을 이고 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고인돌이다. 작은 몸에 큰 짐을 진 바위는 마치 내 삶을 닮은 듯해 가슴이 찡했다. 어두운 오솔길을 나와 펼쳐진 광명아래 묵직하게 서 있는 라비. 이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선물'이 아닐까? 나의 선물이 되어주려고 얼마동안 이곳에 서 있었던 거니?  한참을 미술 작품 감상하듯 그 앞에서 서서 바라보았다. '너를 내 서랍 속에 넣어 둘 순 없지만, 자주 꺼내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이제부터 넌 내 것이야'라며 살포시 앉아 주었다.  

 
내 주머니에, 내 서랍에 넣어두지 않아도 내 것이 되는 것들이 있다. 나무 가득한 오솔길이 그렇고, 삼천년 먹은 바위가 그렇다. 누가 훔쳐갈 염려도 없고 잃어버릴 염려도 없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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