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언젠가 유럽에서 성탄절 선물 지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아일랜드'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특별한 명절이 없는 아일랜드는 성탄절이 연중 가장 큰 축제이고 온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는 날이다. 지방이나 해외에 나가 있는 자녀들도 성탄절 휴가만큼은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그래서 종종 외국에 나가 있는 아이리시는 성탄절이면 향수병에 몸살을 하기도 한다. 성탄절이 그렇게 큰 행사인 만큼 모든 사람들은 12월이 되기 전부터 가족과 친지들 선물을 사느라 바쁘고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위한 터키를 미리미리 준비한다. 특히 성탄연휴는 며칠씩 온 가족이 집에 머무는데다 상점이나 식당들도 제한적으로 문을 열기 때문에 식료품 구입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해 둔다. 2000년 초반만 해도 거의 일주일 가까이 문을 열지 않는 곳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성탄이 그토록 중요한 명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일랜드에 왔으니 이곳 법을 따르겠다는 나의 신념에 맞게 나 역시 아이들과 아이리시 친구들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하루는 유치원생인 작은아이 학부형들 여러 명이 모여서 토론을 벌였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비밀회의 같은 분위기였다. 열 대명의 젊은 엄마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각자 아이들이 희망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말하기 시작했다. 12월이 되면 우체국에는 산타마을로 배달되는 우편함이 마련된다. 아이들은 산타에게 보내는 카드에 자신이 갖고 싶은 선물을 적고 산타에게 인사말과 반성의 글을 적어 우편함에 넣는다. 한 엄마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이는 산타에게 까마귀를 선물해 달라고 썼어요. 그런데 산타 마을에서 야생동물도 만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혹시 만든다 해도 그걸 어떻게 배달할 것이며, 또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밤새 놔 둘 수 있을지 정말 고민이에요."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몇 초점 지나 다른 엄마가 말했다.
"산타마을에는 없는 게 없어요. 까마귀도 물론 있을거에요. 아이가 야생동물을 갖다 달라고 부탁한건 아니겠죠? 그러면 어떤 까마귀라도 되는 거네요. 예를 들면 손을 끼워 인형극 놀이를 할 수 있는 퍼펫 까마귀도 있고, 플라스틱 인형 모양의 새를 사서 까마귀로 칠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자 금세 다른 엄마도 거들었다.
"까마귀 그림책도 있을거에요. 까마귀를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새들, 동물들이 그려진 색칠공부는 어때요? 성탄 휴가 내내 아이가 즐겁게 놀 수 있겠네요."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을 내 놓는데, 모두들 진짜 산타 마을에서 선물 만드는 광경을 목격이라도 한 듯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한 엄마는 산타 공장이 바쁠테니 좀 서둘러야겠다는 말까지 더했다. 나는 너무 어리둥절하여 친한 친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연극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산타 마을이 있다는 거야? 다들 직접 선물 사는거 아니었어? 왜들이래?"하자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흘겨보았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우린 지금 진지해. 그런 말 다시는 하지말어."
그녀들은 모두 심각하고 진지했다. 누구하나 웃음을 터트리지도 않았고 조언을 들으면 종이에 적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도 나오듯이 산타는 거짓말 하는 아이들에게는 안 온다더니만 여기 사는 애들은 모두 거짓말을 안하는 모양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집마다 벽난로와 굴뚝도 있고 혹여 거짓말을 한 아이들이라 해도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에도 반성의 문구를 적어 보내니 어느 할아버지가 노여움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아일랜드에 와서 처음 맞는 성탄절이라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성탄트리도 난생 처음으로 사람 키만 한 리얼 트리를 사서 장식하고 울긋불긋한 방울도 달았다. 그리고 성탄 이틀 전에는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어 나무에 매달았다. 성탄절 이브가 되니 저녁 8시 라디오 뉴스에서 산타가 북극에서 지금 출발하였다며 중계를 시작하였다.
"지금 막 산타는 튼튼한 사슴 몇 마리가 끄는 썰매를 타고 북극을 출발하여 아일랜드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북극의 날씨는 맑고 화창하여 어린이 여러분이 정시에 잠자리에 든다면 오늘밤에는 아일랜드에 무사히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일랜드 날씨역시 썰매가 달리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맑고 좋습니다." 라디오 스피커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톤의 여성 앵커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렇다. 아일랜드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많고 오래전부터 끊이지 않고 성탄절을 지켜온 곳이니 한국과 달리 정말 산타가 오는 것이다.'
성탄절 아침,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일어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카드에 적어 둔 선물이 과연 와 있을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평소보다 두 배는 높은 것 같았다. 트리 밑에 놓아 둔 산타를 위한 우유 한 컵과 사슴을 위한 당근 두 개가 없어졌는지 먼저 확인하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트리 옆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당근도 두 입 깨물어 먹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해 둔 아이들 선물을 슬며시 갖다 두었다.
산타는 결국 내 마음에 있었다. 그가 가져다 준 선물은 동심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설렘과 상상의 나라였다. 얼어있던 반성과 가족을 깊이 생각해 보는 따듯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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