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Eyre Jun 17. 2020

가지 같은 시간

페랑디 15주 차(2020.6.01 - 2020.06.05)


분명한 것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 비바람이 치는 거센 파도 위에서 항해하는 꿈같았던 시간이 끝나니 나의 의도와 다르게 정신없이 무언가에 밀려 멀리까지 와 있었다. 시간은 매정하지만 때로는 공평하게 우리 각자의 상황을 고려하거나 기다리 주지 않고 등을 떠밀었다. 잔뜩 젖은 옷을 짜내고 뒤를 돌아보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따뜻했다. 어쩌면 그것이 비바람이나 거친 파도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파리의 상점은 문을 열기 시작하고 파리 중심부를 유유히 흐르는 센강 근처로 여느 여름처럼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따뜻함을 즐긴다. 아주 길었던 잠에서 깨어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몽롱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스크 안에서 내뿜었던 습관 같은 의미 없는 한숨이 더운 열기와 만나 마스크 안에 입술에 닿고 이내 어디론가 흩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했고 남은 시간을 더 소중히 보내야만 했다.



공부하다가 바라본 건너편 집 풍경



L’enseignement général



CAP 제과 국가 자격시험은 9시간의 실기 시험(4가지 품목)과 필기시험으로 나눠지는데 필기시험은 다시 일반과목(L’enseignement général)과 전문과목(L’enseignement professionel)으로 나눠지게 된다. 일반과목은 정상적인 프랑스의 교육(유럽권 포함)을 거친 학생들에게는 불필요하지만, 유럽권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역사, 지리, 프랑스어, 수학, 과학이 일반 과목에 속한다. 그중 프랑스어는 작문, 그리고 역사와 지리는 주어진 주제 중에 선택하여 발표 자료를 준비하고 감독관과 1:1로 시험을 보게 된다.



코로나라는 이례적인 바이러스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국가의 국가시험의 형태가 바뀌거나 날짜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기사들을 보게 된다. 외국인으로서 외국의 국가 자격증을 앞둔 나에게 남일 같지 않아 항상 주요 관심사다. CAP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에서는 작년 페랑디에서 치른 CAP blanc으로 모든 실기와 전문과목 필기시험을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과목을 의무로 치러야 하는 학생들에 한해, 역사와 지리 발표수업은 화상으로 나머지 과목은 이틀에 걸쳐 학교에서 보기로 결정이 났다.



도서관은 아직 열지 않아서 집에서 공부




함께여서 괜찮아



CAP 시험은 쉽게 말해서 절대평가 방식이다. 모두가 잘하면 모두가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다. 나와 수업을 같이 듣는 페랑디 친구들 중에 나를 제외한 23명 중 3명이 더 일반 시험을 봐야만 하는 학생이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엠마와 라자, 그리고 나를 제외한 또 다른 한국인 한 명이다. 라자는 12월에 페랑디 수업이 끝난 이후 아무도 소식을 알지 못한다. 일전에 줄과 만났을 때 라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나 추측만 난무하는 흥미 없는 주제여서 그 이야기가 오래가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 반면, 엠마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SNS를 통해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댓글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고, 화상 수업 때 이미 원격으로 만난 적이 있다. 한국인 한 명은 나보다 동생이다. 시험 관련 메일을 받고 오랜만에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일반 과목을 보지 않아도 되는 프랑스 친구들은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 되었고 우리 4명은 다가오는 일반과목을 준비해야 했다. 주로 엠마와 더 자주 연락했는데 무엇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보다는 평소에 하던 연락이 더 잦아졌을 뿐이다. 하지만 시험이 주는 불안감과 적당한 긴장감 속에 함께라는 동지애 정도는 느낄 수 있었던 연락이었다. 엠마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프랑스에서 20년을 넘게 일하며 살고 있다. 사실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별다른 것이 없다. 전공과목이 아니기에 단어나 문장도 생소하고 그런 단어들을 더 암기하는 미련한 방법보다는 기존의 기출문제를 풀어 보면서 문제의 형태에 많이 익숙해지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 CAP 관련 사이트에서는 일반 과목 시험은 프랑스 16살 정도를 위한 시험이라고 나온다. '나는 몇 살 정도 되는 언어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엠마는 불어에 대한 걱정보다는 막연한 시험에 대한 걱정이었고 나는 두 가지 다 걱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은 잘 알고 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화이팅이라고 써준 한국말, 감동이었다



불어를 쓰며 살아간다는 것


2년 전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 영어도 못했던 나는 로션을 사야 하는데 세안제를 샀다. 강한 유럽의 햇살로 얼굴이 화상이 입었는데 핸드폰 번역기만 믿고 약국에 갔다가 이상한 크림을 받아서 며칠 더 고생했다. 발표자료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아보고 내용을 요약하며 당연하지만 프랑스에서 불어를 사용하며 무언가를 하는 내 자신이 신기했다. 알파벳을 배우고 읽는 방법을 배운 지난 1년이 떠 올랐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지금도 내 의견이나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수단이 이제는 더 큰 존재로 나에게 다가왔다. 장소와 나이를 떠나서 언제까지 내가 불어를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는 내 선택이지만 분명한 것은 쉽게 잊고 싶지도 잊힐 수도 없는 문화이자 가치이다. 그리고 그들을 깊게 알아 갈 수 있는 중요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불어를 어떻게 얼만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곳 생활수준과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프랑스에서 불어를 쓰며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있는 과정의 일부이다. 





누구나 합격할 수 있는 시험



CAP 제과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 중 10명에 9명은 "누구나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라고 말한다. CAP라는 자체의 시험이 프랑스의 전문분야의 자격증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있는 시험이기도 하며, 합격을 했으니 쉽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험을 합격하면 받는 자격증에 큰 의의를 두고 싶지 않다. 자격증 취득이라는 하나의 간절한 목표로 내가 프랑스에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합격에 대한 압박과 기대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고생을 보상해주는 달콤한 결과물이지만 모두가 그 과정 속에서 배우고 느낀 것은 다르다. 외국인이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 학교에 등록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일련의 과정은 3년 전 나에게 흥미도 없는 관심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 길을 걸으면서 다른 누군가와 같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화려한 기술도 창작의 노하우도, 돈을 많이 버는 방법 등을 배운 것이 아니다. 이 자격증만 있으면 한국에서 대단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괴리감과 우울함에 갇혀 살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직업을 바꾸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그런 직원들이 불과 3년 전까지 내 옆에 있었고 이 곳에 있으면서도 많이 보게 된다. 이 과정과 시험이 나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단련하고 성장시켰는지 나는 글에 녹여냈고 녹여낼 생각이다. 누구나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 누가 합격해야 하는 시험인 것일까? 이 자격증의 가치는 합격의 여부보다 이 곳에서 보내면서 느낀 순간순간의 소중한 감정들이다.





시험보던 날, 제일 일찍 도착한 시험 강의실



결과보다 값진 경험

시험을 보기 위해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학교는 그때와 계절만 른 줄 알았는데  마음도 많이 다르다. 시험이라는 압박을 제외하면 마치 모교처럼 마음이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친구들과 새벽마다 인사를 나누던 학교 입구를 지나 우리의 새벽을 함께 했던 실습실을 둘러보았다. 다른 친구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름이 지나 9월이 오면  면접을 통과한 다른 학생들이 CAP자격증을 위해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길을 걸어가겠지. 시험 보는 학생들 이름을 부를  라자가 없어서 그가 시험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자는  지낼까?' 시험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붙을  있다는 자신감도 없지만 확실하게 불합격이라는 자신감도 없다. 후련하다. 이동제한으로   마트에서 생필품 사기 위해 필요한 불어  마디 사용하고 프랑스 친구들과 안부 연락하기 위해 사용하는 불어를 제외하고  오랜만에 온전하게 불어공부를 했다. 일반과목이라고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화려한 기술보다 찬란하고 보석보다 빛나며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없고 비교하고 싶지도 않은  인생의 가치관을 통째로 바꿔준 특별한 시간이었다. 6 마지막 주에 페랑디 마지막 수업을 듣기 위해 반년만에 다시 친구들을 페랑디 주방에서 만날 것이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나와 바라본 페랑디 하늘에  있는 맑은 구름처럼 기대되고 설렌다.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누구보다  알고 나에게 진짜 프랑스를 보여준  감사한 친구들이다. 결과는  손을 떠났지만  경험과 추억 그리고 우리의 맞잡은 손은 6 말을 기다린다. 




6월말까지 잘 있어 ! 다시 올게




이전 17화 가지 같은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