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랑디 12주 차(2020.04.20 - 2020.04.24)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침이면 새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따스한 봄날의 햇살은 나의 작은방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페랑디를 가기 위해 매일 같이 마주했던 집 앞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초록색 옷을 입고 여름을 맞이할 준비로 바쁘다. 두꺼웠던 옷들을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한결 가벼워진 옷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파리지앵들 삶 깊숙함 속에서 그들을 바라볼 때면 많은 생각이 스친다. 지독한 코로나와의 전쟁으로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고 나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봄은 코로나와의 전쟁의 순간에도 찾아왔고 나는 해가 넘어서 한 살을 더 먹었으며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굴러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 곳에 왔고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목표를 마무리하기 위해 남아 있기로 선택한 나는 여전히 잦은 감정 기복과 갈등을 마주한다. 나는 어쩌면 코로나가 아닌 나와의 지독한 싸움 중이다.
謀事在人 成事在天
모사재인 성자재천
'계략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서 억지로 할 수 없다'라는 말로 삼국지의 제갈공명의 말로 유명하다.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페랑디 주방에서 눈물의 이별을 했던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 한참을 매일 같이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침 5시면 습관처럼 눈이 떠진다는 하타나, 그날 이후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로 떠난 줄이 보내주었던 프랑스 남부의 사진들, 파리 외곽의 정원이 딸린 집에 사는 엘로디는 혼자 연말을 보낼 나를 생각해서 가족 연말 파티에 나를 초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5월 전에는 다시 만나기로 매일 같이 약속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실습 시간 동안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사는 줄만 두 번 만났다. 3개월 동안 하루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이제 혼자서 보내야 하는 나에게 그들은 나의 가족과 같았고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소중한 존재들임이 틀림없다.
사실 우리의 정식 수업은 2019년 12월 20일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2020년 5월 첫 주, 실습을 모두 마치고 학교에 복귀해서 일주일의 수업을 더 듣고 CAP 제과 시험을 치르기로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 사태로 프랑스 전체가 마비가 되고 이동제한이 걸리면서 물론 학교의 계획도 각자의 계획도 불투명 해진 상황이다. 각자의 제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코로나를 원망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만 했다. 생각보다 이 상황이 오래갈 것이라는 예측 외에는 아무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타의 말처럼 파리 대규모 파업에 코로나 사태까지 최악의 한해 일지 모른다. 한치의 오차 없이 감사할 만큼 잘 진행되던 내 계획에 적신호가 켜졌고 모든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이 되기 몇 주 전 학교는 우리 모두에게 화상수업을 진행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난생처음 원격 화상 수업
5월 첫 주의 수업과 CAP 시험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라의 방침에 따라 무기한 미뤄진 상태고 이 화상수업은 추가적인 수업의 연장선에 있다. 녹화된 수업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방적으로 시청하거나 짧은 화상 면접을 진행한 적은 있지만 실시간으로 다수의 인원이 동시에 접속하는 화상 수업은 처음이다. 학교 측에서 보내준 몇 차례 메일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4월 21일 화상채팅으로 만 4개월 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24명의 인원은 그룹별로 12명씩 한 명의 셰프와 각각 다른 시간대에 수업을 받는 형식이고 한 과목당 최대 시간은 3시간이다. 반갑기도 했고 서로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리웠던 마음보다는 코로나로 서로에 대한 걱정과 향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을 오간 뒤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조리복을 갖춰 입고 서로 마주 보며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고 직접 셰프와 소통하는 수업은 이제 각자의 공간에서 화면으로 이뤄진다. 수업의 명칭은 실기수업이지만 모두 조리복을 입지 않았고 그렇다고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제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셰프는 종종 자택에서 부족한 도구와 재료로 SNS에 학생들을 위해 녹화한 제품을 만드는 영상을 올린다. 하지만 화상수업은 셰프의 이야기만 듣고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만들었던 제품에 대해 다시 한번 입으로 확인할 뿐이다. 중간중간에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도 할 수 있지만 오프라인보다 확실히 전달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다소 혼잡한 불협화음 속에 수업은 진행되었다. 페랑디 주방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할수록 난 그들에게 동화되어 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났다. 13명의 인원 중에 나 혼자 외국인이라는 사실과 자주 사용하지 않아 굳어버린 불어 실력이 화면 속의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셰프가 가끔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가 잘 듣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련의 행동이 매우 낯설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
학교 친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서 빵 과자를 만든다. 코로나 이후 그 빈도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나는 학교 친구들의 채팅방과 그들의 SNS에서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밀가루 15킬로를 포대로 주문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고 제과제빵 재료 전문 업체와 연락해 택배로 다양한 재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유해준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빵 과자를 접하는 횟수가 확실히 많고 빵은 주식처럼 먹는 친구들이다. 심지어 이들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제품 복습 및 테스트, 가족들의 식량 확보를 핑계 대고 원 없이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론은 앉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만이지만 실기는 다르다. 만들어보지 않고 실수를 경험해 보지 않고 완벽하게 몸이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제품을 절대 만들 수 없다. 내가 듣는 제과 CAP 수업은 취미반이 아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함이고 프랑스 제과점에서 일할수 있는 합법적인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목표다.
셰프가 화상 실기 수업에서 우리에게 제안했다. 한주에 한 품목씩 정해서 모두가 각자의 집에서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보고 온라인 상으로 서로의 제품을 확인하는 것이다. 서로의 제품을 비교하고 셰프는 사진으로 제품의 문제를 올바르게 잡아준다. 첫 주는 Fraisier(딸기 케이크)가 주제였다. 다음날 자신이 만든 제품을 채팅방에 올리기 시작한다. 도구와 재료와 환경이 열악해서 제품의 모양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더 다양했고 완벽하다. 시간제한도 없고 딸기 개수 제한도 정해주지 않았다. 사진을 본 공통적인 셰프의 의견은 '시험에서는 장식을 그렇게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시험에서는 딸기가 케이크 밖으로 나오면 감정의 요인이 된다' 등이다. 수업이 끝나면 이 재료는 어디서 구했는지 사이트를 공유해주고, 옆면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딸기는 몇 개에 얼마 정도 하는지 등등의 문자가 채팅방에 가득 쌓인다. 나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작은 내방 안에서 그들의 사진을 보고 부러워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당장이라고 실습복을 입고 그들보다 멋지고 더 창의적인 Fraisier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면도 그림이라도 그려보기 위해 펜을 잡았지만 포기했다. 죄 없는 배합표와 구글에 올라오는 사진들만 투덜거리며 뒤적인다. 장비와 제대로 된 도구가 없고 작은 원룸 방안에 그것을 대충이라도 흉내 내 볼 수 있는 탁자 조차 없다. 나는 언젠가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에 집은 그저 쉬는 공간이었다. 페랑디 주방과 리츠의 주방에서 남들보다 더 집중했던 상황이었다.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외국인이라는 신분과 프랑스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휘감으면 마치 나의 텔레파시라도 받은 것 마냥 친구들에게 이해하고 힘내라며 메시지가 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절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왜 제품을 만들지 않았는지에 대해 추궁하지 않지만 부득이한 핑계로 진행되는 이 잔인한 수업방식이 나에게 너무 힘든 상황이다. 진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상황, 손가락을 움직이고 머리를 회전시켜 창작을 못하는 상황, 내 나라에 있을 때보다 하루하루가 값지고 너무 소중한 순간들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 상황, 모두가 다 할 수 있지만 나만 못하는 상황이 너무 밉다.
우리의 미래, 나의 미래
CAP 시험만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한국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확히 말하면 마무리해야 할 문제가 없다면 귀국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자격증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느꼈던 시간이기에 종이 한 장으로 증명되는 자격증이 내 프랑스의 삶까지 증명하고, 내 삶을 크게 변화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만큼 마무리도 나에게 중요한 문제다. 외국인들은 비자며, 생활비며, 여러 가지 행정과 그들과 다른 정신문제를 가지고 그들보다 조금은 다른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불안전한 존재다.
시험날짜에 대해 코로나가 시작되고 많은 기사들을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보게 된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고 모든 기사가 정확하지 않음을 감안하면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고 지내야 한다. 확실한 것은 5월 11일(현재까지 정해진 프랑스 이동제한) 이후에 무언가 결정이 날 것이다. 모두가 예민하고 모두가 귀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개별적으로 친구들에게 시험 관련 기사 요약 메시지며, 자신들이 직접 자격증을 발급해주는 국가 기관과 접촉하여 받은 메일들과 안부 메시지들을 보내준다. 내 현재 상황을 기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나보다 나를 더 가감 없이 직관적으로 바라보며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온전하게 바라본다. 내 미래가 그들의 미래가 되고 그들의 미래가 내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장 이뤄내야 할 꿈이 같기 때문 아닐까?
Même si c'est personnel, n'hésite pas nous demander,
si on peut t'aider. car on est une famille.
만약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망설이지 마,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우리의 건강한 꿈은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한국인 제과 유학생들과 잘 교류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보이는 이기심과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몇 년씩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과 함께 일을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 곳에서 그들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를 많이 보았다. 타지에서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별나게 행동하는 모습과 작은 질문에도 인색하게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매우 불편한 이질감을 느꼈다.
페랑디를 통해 맺어진 나의 프랑스 제과 친구들은 솔직하다. 사람을 처해진 환경이나 배경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외국인인 나의 문화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궁금해하고 어려운 부분은 손발을 벗고 나서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들이라는 것을 코로나 기간 동안 더 체감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들에게 문자만 오면 투정스럽게 내뱉는 내 이야기를 성의껏 들어준다. 매일 같이 나에게 교대로 문자를 보내주고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들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있어도, 각자의 미래와 꿈을 공유하며 건강한 관계의 제과인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위기 속에서 진실한 사람은 더 빛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향기가 진해지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이지 않을까? 하루빨리 화면이 아닌 학교에서 직접 마주 보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Courage Sungmin vas y, Tu es une personne très forte.
Comme un champion.
tu nous manques et je pense trés fort à toi.
ne baisses pas les bras
힘내, 가자! 너는 마치 챔피언처럼 강한 사람이야
우리는 네가 그리워.
그리고 나는 네 생각을 많이 해. 포기하지 마라.